"나가 봐." 무언가를 탁자 위에 내려둔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간다. 젖은 수건을 집어들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위의 식은땀을 닦는다. 식은땀에 젖어 가는 경수를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축축해지는 것만 같았다. 기분마저도 비를 맞은 종잇장같이 눅눅해진다. 대신 아파 주고 싶은 것처럼, 대신 땀을 흘려 주고 싶은 것처럼. 행여나 작은 바람에도 감기가 더 심해질까 창문들도 꽁꽁 닫아 놓았더니 공기가 조금 더웠다. 땀자국이 난 볼을 닦아 주던 찰나에 경수가 말했다. "왜 말이 없어?" 침대 시트를 짚고 있던 손을 괜히 꽈악 쥐었다. "열이 38도가 넘었어. 힘들면 날 부르면 됐잖아." "당신을 불러서 뭐?" 백현은 최대한 차분한 투로 말했다. "너 곧 국서야. ..
여느 때와 달리 날씨가 우중충하던 날이었다. 지구는 우주로 온통 둘러싸인 채 자전한다. 그 안에서 난 살아 숨 쉬고 있다. 믿기면서도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다. 나도 언젠간 죽고, 다른 사람들처럼 여러 감정들을 느끼며 여생을 살 테지만 우주란 건 무얼까. 감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믿기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모든 걸 초월하는 광활함 속에서 나는 분명 살아있는 게 맞을까. "왜 잘 해 줘요?" 백현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꼬옥 쥔 경수의 손등을 엄지로 쓸어내리기만을 반복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경수는 백현을 쭈욱 쳐다보았다. 하늘, 땅 그리고 바다. 사람, 동물, 무생물 모든 게 꿈만 같다. 눈을 감았다 떠도 모두 그대로이지만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는 것들은 소수였다..
누구야. 말 했다. 밤 앞에 우뚝 선 처음 보는 그에게. 하지만 듣지 못한 듯 뒤돌지 않는 그 때문에 벽 뒤로 몸을 슬쩍 숨겼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란 것을 알지 못 하는 걸까.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누구냐니까. 막상 테라스를 바라 보고 서 있는 그는 태평해 보였다. 이 집은 내 집이었지만, 마치 자기 집인 마냥 주머니 안에 손 까지 꽂아 넣은 채 였다. 잠결에 일어나 나도 모르게 향하게 된 거실엔 웬 남자가 밖을 보며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겁 부터 났지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남자는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푸른 달빛 내리는 그곳에서 꼼짝하지 않는 그 때문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귀신이 아닐까.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도둑이야? 질문을 바꿔 다시 한 번 물으니 스윽 뒤를 돈다. 어깨만 ..
생경한 분위기 아래 놓인 두 눈망울이 무섭게 번뜩였다. 누가 먼저 질세라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쉽게 내리지 않았다. 백현이 쥐고 있던 머그컵을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까지도 눈 한 번을 깜짝하지 않자 경수의 목울대가 올라 갔다 내려 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지 못한 세훈이 헤헤 웃으며 말 했다. "기장 님이 건물 소개해 주시는 게 어때요?" 전 좋습니다, 하고 먼저 순응한 경수를 맡긴 채 뽈뽈 뛰어 가는 세훈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서로를 얼마나 지켜 보았을까... 머릿속엔 수만가지 생각들이 둥둥 떠 다니기 시작 했다. 한창 출근 시각이라 분주한 로비와 달리 상당히 한산한 고층 복도. 밝은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몇년 전 장거리 연애 특성상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서울 중심가의 응급실에 섞인 여러 기계 신호음과 고함, 그리고 의료진들의 다급한 외침. 그 속에서 거세게 호흡을 강요하고 있는 그의 폐 때문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가슴에 귀를 대어 본 의사가 쉴 새 없이 덜커덩 거리는 베드 옆으로 쫓아 오던 간호사에게 무어라 지시 하였다. 무의식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산소 호흡기를 꼬옥 붙들고 있어야만 해야할 때, 셀 수 없는 발자국 소리들이 재빠르게 수술실 안으로 사라졌다. 응급 수술을 항시 대기하고 있는 의료진들이 투입 되면서 부터 호흡은 더 아슬아슬해져만 가고 있었다. 삶의 나락에 서 있는 듯 안개로 가려진 아래로 떨어질까, 말까 고뇌 중인 듯해 보이는 상태 였다. 위태로웠다. 살려야만 했다. 그가 누군지도, 그의 그도 누군질 알았기에 더욱. 마침 인력이 충분할 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공간 속에서 모두가 우두커니 서 숨을 죽이고 중앙에 놓인 침대 모양의 고철로 시선을 모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여러 사람들이 동그랗게 중앙을 둘러 싸고 서 있는 형태 였고, 가운데에선 무언가 사람으로 보이는 듯한 생명체가 서서히 눈을 뜨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 연구소 중 가장 우두머리인 노인 소장이 안경을 한 번 치며 올리며 조수에게 말 했다. "어떤가." 모니터로 혈압과 뇌파를 지켜 보던 조수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말 했다. 연구소의 모든 인물들이 벼르고 벼르던. "끝내 주는 괴물 입니다..." 이 존재를 세상 밖으로 그냥 내보냈다간 생소함이 눈에 띄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확실하지 않다. 마침내 존재의 눈이 완전히 뜨이자 모든 연구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부둥켜 안으..
+) 최종 수정 01:15 완료 하였습니다. 빠른 개선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을 때 맛 들인 게 담배 였다. 그저 핑계에 불과 했지만은 어이 없게도 사람도 아닌 것에게 위안을 얻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바라는 것은 가고 싶은 길도 정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성공 뿐이었다. 이 열여덟에 꿈도, 희망도 있지 아니하고 아픈 기억만 수두룩한 게 내 또래에 몇이나 있을까. 자켓 주머니를 뒤적이며 담배갑을 찾았다. 학원이 끝난 후엔 항상 해가 저물어져 있다. 자욱한 밤공기 가득한 시내 거리는 항상 경수를 달랠 수 없었다. 걸어도, 뛰어도. 혼자 라는 외로움만 가득 했기에. 학원 건물을 나와 바로 앞에서 한개피를 물어 빼려는 경수의 옆으로 부터 하얀 담배 연기가 볼 언저리를..
"팀장 님이신가요?" "아, 예... 그런데 누구..." 백현이 어물쩡이게 앉으며 초면 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근엄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남자를 흘겨 보았다. 아우라만 보면 임원감인데... 사회 경력으로 쌓은 스펙 레이저로 남자를 아무리 스캔하여도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 다니는 것은 '높은 사람'이었다. 굳이 위에서 호출할 정도면 굉장히 굉장한 분이 아니실까. 바로 눈이 마주치자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백현과 달리 눈썹 한쪽도 꿈틀 안 하는 남자 때문에 입꼬리에 경련이 오려고 했다. 아, 맞다. 자켓 안 주머니에서 손을 두어번 뒤적인 뒤 명함을 꺼낸 백현이 다시 일어나 정중하게 명함을 건내며 악수를 요구 했다. 무미건조한 눈매로 건네는 것을 받아든 남자는 무표정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영업부 팀장 ..
어릴 적 한동안 시름시름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었다. 새로 산 손목 시계가 시간 불문하고 아무 때나 울려서 시계가 없는 교실 안에서 손목을 움켜 쥐고 있기 고군분투 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금은방에서 문제를 해결한 뒤엔 불안이 가셨지만, 그때 왜 고작 이 삐빅 소리 때문에 그렇게 크게 반응 했었지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낯설었던 반 아이들 때문이었을까. 사소한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움켜 쥐고 싶을 만큼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그랬던 걸까. 고등학교는 정말 조용히 다녔다.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도 같이 밥도 먹을 만큼 친했던 친구는 없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이 학창시절을 허무하게 소비 하였다고 해도 괘념치 않..
"팀장 님 신호가 흐려집니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초록색 작은 동그라미. 다급하게 외치는 인호의 입을 순간적으로 틀어 막고는 검지를 입술 위로 슬며시 대었다. 비장한 눈빛 아래 입모양으로 말 했다. 다물어. 그 모습에 인호는 자신이 그의 심기에 대한 무언가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반면 예키지 못한 사고에도 백현은 침착 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야. 몰래 붙여 놓은 GPS 신호가 흐려지는 것은...... "제기랄." 또 들켜 버린 걸까. 백현이 앞머리를 느리게 쓸어 넘겼다. 카메라 속 그가 너무 밝게 웃고 있는 바람에 열이 뻗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야." "예, 예?" "드론 회수 해. 정리 하고 퇴근 해라." 곧 안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든다. '그 일'이 있고 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