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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하늘이란

기도 冀圖 2017. 3. 18. 22:00
생경한 분위기 아래 놓인 두 눈망울이 무섭게 번뜩였다. 누가 먼저 질세라 그 누구도 먼저 시선을 쉽게 내리지 않았다. 백현이 쥐고 있던 머그컵을 입술에 가져다 대면서 까지도 눈 한 번을 깜짝하지 않자 경수의 목울대가 올라 갔다 내려 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지 못한 세훈이 헤헤 웃으며 말 했다.

"기장 님이 건물 소개해 주시는 게 어때요?"

전 좋습니다, 하고 먼저 순응한 경수를 맡긴 채 뽈뽈 뛰어 가는 세훈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서로를 얼마나 지켜 보았을까... 머릿속엔 수만가지 생각들이 둥둥 떠 다니기 시작 했다. 한창 출근 시각이라 분주한 로비와 달리 상당히 한산한 고층 복도. 밝은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몇년 전 장거리 연애 특성상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지는 법이기에 자연스레 이별의 시간을 갖게 된 둘이 직장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둘 모두 별 생각 없던 때에 마주치게 되자 서로에게 날을 세웠다. 애인이 있나? 있을까? 만나기만 하면 아주 솔로들의 레이저를 직격타로 맞을 만큼 닭살 돋는 열정적인 커플이었는데 말이지. 그래 보았자 젊은 피가 끓는 20대 초중반 때 이야기이다. 그 시절의 모습을 빼다 박아 놓은 듯이 그대로 생겼다.

곧 있을 비행을 위해 커피 한잔을 마시려던 백현에게 복도 산책이란 늘상 있던 일이었다. 어쩌다 도경수가 스튜어디스가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우두커니 서 있던 백현의 손목을 거칠게 덥썩 잡아채며 바로 옆 탕비실로 들어선 경수가 다짜고짜 넥타이를 억세게 쥔 채 입술을 맞춰 왔다. 직인이라도 찍어 내듯 꾸욱 누르는 모양새에 그만 백현이 머그컵을 손에 놓은 채 탕비실 문을 닫았고, 머그컵이 깨져서 난 와장창 소리에 잠시 미간을 구겼다. 커피는 이미 아까 다 마셨다. 것도 잠시 역으로 경수의 목 부터 턱을 잡은 채 반대쪽 벽으로 확 밀어 붙인 채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깊숙히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센서가 감지되어 켜진 불빛 아래에선 감정선상으로는 등 뒤로 이제 막 불꽃놀이의 첫 불꽃이 서막을 연 것만 같았다. 하늘을 훤히 밝히는 그것은, 인페르노의 파라다이스. 지옥의 낙원? 어떻게든 생각 해도 좋다. 아무리 상세히 설명하여도 이 기분을 서술해 낼 수 없을 테니까.

그간 누군가를 사겼던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도경수를 만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요인을 통해 몇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 했을 뿐이다. 남자는 새 사람에게 약하다던데... 난 아닌가 보지 뭐.

"하아..."

숨을 뱉은 백현이 고개를 슬쩍 빼며 오른손으로 경수의 앞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손결이 지나 새까만 색의 머리칼들이 사라락, 내려 온다. 다시 돌아와 달라는, 가슴이 아리다는, 이런 말 한 번 없이 너무나도 깨끗이 끝이 났던 인연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되면서 그 때 그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짜여 있는 각본인 듯, 서로를 꼬옥 껴안았다. 백현의 제복 위 쇄골에 눈을 묻고 고요히 감은 속눈썹이 옅게 떨렸다. 그 또한 품에서 놓아 주지 않기 위해 경수의 셔츠를 주먹이 터져라 쥐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람과 이별할 때 이러한 말을 주고 받는다.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겠지'. 그 말이 지랄이라는 건 딱 들어도 알겠지만 속는 셈 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내 사랑이었던, 이 작은 괴물을 또 만났으니.






백도 하늘이란
/기도 씀






어쩌면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시 재회하게 된 인연과 하루만에 재결합? 하지만 우리만 환장하게 좋으면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부터 서스름치 않게 도경수와 눈이 마주치면 응큼하게 키스를 날리게 되었다. 오세훈이 다름 아닌 갑자기 마주친 백현에게 경수를 맡겼던 것은 이 이유 였나, 라는 생각이 든다. 스케줄 모두 백현과 경수는 같은 비행기 였고 그 결과 함께할 시간이 오질난다는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비행 전 잠깐 휴식을 가지면서 커피들을 한 잔 씩 하던 타임에, 막둥이라 제일 찌그러져 있는 경수와 눈이 마주쳐 백현이 윙크를 날렸다. 경수도 무언가를 하려다 다른 승무원과 대뜸 눈이 마주치자 다시 목각 인형으로 변했다. 그건 백현도 마찬가지 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마치 도 라도 닦고 있는 듯이 기계적으로 머그를 잡고 커피만 홀짝홀짝 마시며 '눈치 못 챘겠지'라고 생각 했다.

이러니까 더욱 시원하게 킥킥 거리고 웃고 싶어졌다. 하지만 신분이 노비급인 것을 어찌 하나... 내적 한숨을 쉰 경수가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그 사이에 부기장이 말이라도 걸어온 듯 무언가를 주제로 대화하는 그가 보였다.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라. 언제 다 마셨니. 무안함에 맨입만 쩝쩝였다.

"잠깐."

연지가 앞을 지나려다 갑자기 멈추어 서며, 살짝 말린 셔츠 깃을 유심히 바라 보며 펴 주었다.

"됐어."
"아 감사합니다."
"항상 신경 써."
"네, 선배."

간단하게 대꾸를 마친 경수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이 닿았던 곳에 다시 입술을 올리며 눈알을 굴렸다. 백현은 아직도 대화 중이었다. 못 본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봤다면 뭐가 어쨌다니, 저쨌다니 하며 말이 많아질 게 분명 했다. 목을 무언가가 죄이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목 끝 까지 매인 넥타이를 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칼을 한 번 쓸어 올려 주었다. 이만 하자는 말에 하나 둘 자리서 일어났다.

모두 발을 맞추어 오늘의 비행을 위해 나섰다.



*



그 시절에도, 현재도. 누구 하나 정식으로 만나자는 말 하나 없이 연애를 시작 했다. 마치 잔잔한 호숫가 같았던 이별 처럼. 사귀자는 말이 없었어도, 상대방의 입가에 머무르면서 자동으로 N극과 S극이 되어 하나의 자웅동체를 이루었다고 해야 할까. 별 생각 없었는데 근래 백현을 다시 만나면서 부터 여러 일이 막 떠 올랐다. 경수가 피식 웃었다. 그땐 변백현이 세계 최고 잘 생긴 줄 알았지.

"경수. 이제 좀 쉬어."
"아, 예... 감사합니다."
"수고 했어. 감당 하느라."

불과 20분 전. 경수는 바로 진상 손님과 대치 했다. 아직 이코노미에서 머무는 경수에겐 바로 쥐약이 따로 없는 일이었다. 그 많은 메뉴얼을 달달 외우고 연습 했음에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당황해서 그래, 라고 상황을 무마해 보려고 해도 진상 손님에게 이미 청력이란 무용지물인 셈이었기에 몸싸움이 날 뻔한 것을 겨우 다른 승무원이 달려 와 말렸다.

"아니, 애 새... 가 아니고 아이가 혼자 머리 박고 다친 걸 왜 저 한테 화풀이 한대요?"
"다 참는 수 밖에 없어. 내가 대신 자리 메워 줄 테니까 눈 좀 붙이다 와."
"정말 감사해요 선배."

연지에게 힘 없는 미소를 짓곤 터벅터벅 걸으며 수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짜증나. 아랫입술을 댓발 내밀며 문을 벌컥 밀어낸 경수가 쾅쾅 거리며 걸어 와 먼저 와서 누워 있는 누군가의 옆 침실에 앉아 신발을 벗곤 털썩 누웠다. 평생 잠 들어도 좋을 만큼 편안했다. 이불을 가슴께 까지 끌어 올리고, 동그란 눈으로 천장을 쳐다 보며 생각 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은 더 형이었던 백현과 내가 만났을 적엔 서로 무엇을 공부하는 지 전혀 알지 못 했던 것 같다.

너무 강렬하게 시작 했고, 느슨하게 끝을 맺어 버려서일까. 애초에 굵고 짧은 인연이었기에 알 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 내가 근무하는 곳의 기장이라니.

눈을 꾸욱 감았다.

음? 볼에 뭔가 바람이 스친 것 같아서 창문이 열렸나 싶었지만 여긴 기내 라는 게 생각나 눈을 번쩍 뜨고 그 방향으로 고개를 훅 돌리자 가만히 쭈그리고 경수를 쳐다 보는 백현이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불과 10cm가 될까 말까 했다.

"뭐야 너 였어?"

경수가 황당하단 어투로 말하자 백현이 큭큭 웃으며 이불을 걷어 올리며 안으로 다리 부터 넣어 들어 왔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
"안 와 안 와."
"근데 왜 여기 있어?"

수면에 제격인 금빛 조명에 비추어 베개 위로 머리를 괸 백현의 그림자가 그을려져 왔다.

"기장은 잠도 자면 안 되냐?"
"이래도 되는 거면 매일 있으라구."

경수가 비죽 웃어 보이자 백현이 그 둥근 머리통을 감싸 안아 누웠다. 1인용 침실이 들어차 여차해서 누군가가 잠버릇이라도 부리면 뒷통수가 깨질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손가락으로 백현의 복부를 약하게 찌르며 말 했다.

"그거 알아? 우리, 맨날 사귀자는 말도 없이 사겼어."

흐음 하고 머리칼 위로 날아드는 콧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뭐 하러 그런 선을 두는 거야? 어쨌거나 난 널."

감지도 않았는데, 눈 앞이 컴컴해진다. 백현이 어둠으로 부터 가려지는 하나의 형체 처럼 서서히 또는 빠르게 사라지는데 입 마저도 열 수가 없다. 귓속엔 무의식 속에서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한 문장만이 분명하게 박혀 들었다.

"사랑하는데......"



*



눈을 떠지지 않는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호랑이 라도 된 것 처럼 괴이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단 직감 뿐이었다.

"... 떠 보거라!"
"......"
"눈 좀 뜨란 말이야!"

그 말에 절대 올라가지 않던 눈두덩이가 가볍게 올라 간다. 백현이었다. 나에게 호통을 치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가. 이게 무슨 일이야. 사고 라도 난 건가... 잠깐 사이 판단을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경수를 백현이 다짜고짜 품에 가득 안았다.

"... 갑갑해, 이, 미친... 새... 끼야."

너무 꽉 안아 와서 목구멍이 턱 하고 말혀 올 때 즈음 백현은 경수를 놓아 주었다. 겨우 눈을 떴다고 생각하는 백현이 품에서 놓아 주었다고 떨어질 인간이 아니었다. 근데 한국사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띠는 왜 이마에 두르고 있나... 헉. 하며 백현을 밀치고 벌떡 일어난 경수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분주한 사람 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지켜보는 사람 반이었다. 그 중 몇사람들은 '황자 님이 깨어 나셨다!'라고 외치는 것을 보니, 언뜻 나... 를 가르키는 명칭인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고 고개를 내려 가슴 부터 복부 까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려 보았다.

... 비단옷. 게다가 휘황찬란한 자신과 백현의 옷차림과 주위 사람들의 옷차림. 누가 보아도 과거이다. 애초에 카메라 따위가 있을 거란 것을 바라는 게 바보 짓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경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꿈인가. 항상 못해 보았었지만 꿈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으로 볼을 가격 했다. 하지만 너무 세게 친 모양인지 내친 방향으로 고꾸라지면서 표정을 굳혔다.

젠장 아파. 존나 아프다.

"드디어 미쳐 버린 거냐! 정신 좀 차려 봐!"

또 변백현이 울상이 되어서 흙바닥에 그 귀한 옷을 부벼대면서 까지 경수의 볼을 움켜잡고 눈물을 질질 흘린다.

"산책하다 쓰러진 것은 무어고, 왜 이러는 거야."

여차 생각하다 보니 이 자식도 진짜 변백현이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하아. 비행기가 추락 하기라도 해서 시공간을 넘나든 건가... 이리 저리 추리해 보아도 말도 안 되는 것들 뿐이었다. 민속촌에 날 버려 놓고 갔나...?

"백현아. 이게 무슨 짓거리이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마마! 마마!!! 그 때 다급하게 달려온 각각 흰수염을 매단 할아버지들이 백현 처럼 흙바닥에 무릎을 비벼대며 허겁지겁 경수의 상태를 살핀다. 얼 빠진 얼굴로 상황을 지켜 보던 경수는 기여이 '생각을 포기하고 싶다'까지 나아간 상태 였다.

"... 다들 장난 치지 마세요. 여기, 민속촌 맞죠?"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치자.

"아이고 이거 정말... 마마 때문에 폐하 께서 수저도 못 들고 계십니다."

진짜일까. 경수가 팔을 스르륵 들자 이 땅 위 모든 사람들이 엄숙해졌다. 그리고 나선... 코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할아버지의 수염을 살포시 잡고 천천히 당겼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마마..."
"가짜면서..."

가짜... 가짜가 튼튼하네. 하하... 허미 시벌 세상에. 헛웃음을 짓던 경수의 동공이 위로 넘어가며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어 버렸다.



*



현실이었다. 난 이 고려 라는 나라의 황자 라는 것도. 모두. 그리고 변백현이 왕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복형제 였다. 기억상실로 착각하여 가족 관계와 지위등을 읊어준 할아범이 나간 후 혼이 빠져 나간 것만 같았다. 내게 왕은이란 친구와 같은 형제이고, 가장 친한 관계 라고 해 주었다. 저기나 여기나 곁에 딱 달라 붙어 있는 구도인 것은 별 다를 것 없구만. 이만 해탈한 채로 이불 위로 풀썩 몸을 뉘인 경수가 눈을 붙이자, 문이 양 쪽으로 벌컥 열렸다.

"이젠 좀 나아졌느냐."

뒷짐을 진 채로 성큼 들어온 백현이 씨익 웃어 준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말투. 눈을 크게 뜬 경수가 백현을 향해 작게 손짓 했다. 네 자식만 와 보라는 뜻이었다. 잠깐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나비 날듯 나풀나풀 걸어와 자동으로 경수의 입가에 귀를 대어 주었다.

"너 빼고 다 나가라고 해."

뭐? 하며 황당해 하더니 큼큼, 목을 푼 뒤 모두 나가라고 명령 했다. 보통 황자궁이라기에 이 황자궁은 너무나도 화려 했다. 이 즈음이면 황태자궁 같은 데는 얼마나 화려할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 환경이 낯선 듯 두리번 거리며 장식품 등을 보는 경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올리며 경수만을 응시 했다. 평소엔 절대 보이지 않던 호기심 그득한 얼굴.

"정말 아픈 게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완전 멀쩡한데."
"소심병이라도 걸린 게 아니냐. 안 하던 짓을 자꾸만 하니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지."

백현의 소매 천이 부벼져 올 정도로 가까웠다. 띠 위로 살짝 내린 앞머리 때문일까, 전 하고 이미지가 완전 딴판이었다. 한국의 변백현은 망나니 라고 하자면, 고려의 변백현은 인자킹이다. 백현의 어깨 위를 덥썩 잡은 경수가 말 했다.

"야 잘 들어. 난 고려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야."
"... 한국이란 나라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야 당연하지. 나 역시도 고려의 후손이니까."
"......"
"이 몸 주인에 대해 얘기해 줘. 보답으로 난 내가 살던 곳의 이야길 들려 줄게."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해를 하지 못 할까 염려 되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면 대충 뭔지 알겠단 것만 같단 것 같았다. 지가 알아 보았자 얼마나 알기야 하겠다만은, 우선적으로 이해가 제일 중요 했다. 백현의 두 눈동자가 떨리는 게 육안으로 보인다.

"나 못 믿어?"
"믿, 믿고 말고."

고개를 내려 시선을 피한다.

"원래 성격과 천지 차이라 혼란이 와서 그렇다."



*




궁 안엔 찌라시가 하나 있다. 태자로 부터 황자들이 멸시를 받고 있단 것이었다. 아비는 같아도 어미는 다른 황자들이 널린 판국에 태자는 홀로만의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이었다. 것은 욕심이고, 오만함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그의 신념 속에서 헤엄쳐야 할 고려는 곧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라 말 한다.

"허억... 헉..."

급하게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태자 마마?"

쉿. 미간을 찡그리고 고갯짓하자 서둘러서 눈 앞에서 사라진다.

... 아프단 말에 한달음에 달려 나왔는데 이미 백현이 와 있을 줄이야. 주먹을 떨던 종인이 다시 왔던 길을 쿵쾅쿵쾅 빠르게 걸었다. 검술을 연마하던 중이었다. 그로 인해 복장은 거뭇거뭇한 훈련복 차림이었던 도중에 뛰쳐 나와 버려 종인을 놓쳐 버린 궁녀와 신하들이 그를 발견하자 마자 근심 많은 얼굴로 뒤꽁무니에 따라 붙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다고 입을 열기도 전에 내쳐지는 것은. 넌 황태자니까. 넌 차위 계승자이니까. 그러니 무조건 강해져라 이것인가? 내가 무슨 사자 새낀 줄 알아! 종인이 이내 칼집을 바닥에 내던진 채로 황자궁을 빠져 나왔다.

"태자 마마... 무슨 문제가,"
"찾지 마. 따라 오지도 마."

으이이이...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대며 괴상한 소릴 내는 아랫사람들을 두고 무언가로 부터 쫓기듯 태자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엔 신경질이 잔뜩 나 있었다. 나에겐 친구란 게 없다. 궁 밖 사람들도 아닌 절친한 형제 왕은과 왕연. 또는 백현과 경수. 본명 까지 떠 올리게 되자 머리 끝 까지 화가 난 종인이 평정심을 잃고 태자궁의 입구를 발로 밀어 차 열었다.

난 언제 까지.
아무것도 없는 뒤로 부터,
쫓겨야 하는가.



*



그 열째가 넘는 황자들 중 제일 친하다 뵈는 것은 왕은과 왕연이었다. 활발하고 떠들기를 좋아 하는 천상 장난 꾸러기 왕은과, 그에 상반되는 조용하고 무뚝뚝한 성격을 가진 왕연. 어떻게 해서 꼭 반대 되는 애들 끼리 친해졌느냐는 모르겠다만 지금 백현이 쩔쩔 매고 있단 것은 알겠다.

"아 멍청아. 그렇게 하면 날아 가 안 날아 가?!"

어, 미안... 백현이 주눅을 들어 하자 경수가 팔을 받쳐 주며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다름 아닌 평소 자기들이 자주 했다던 새총 쏘기를 보여 주는데 영 시원찮은 것이었다. 몇겹이 덧대진 옷이었지만 가까이 있으니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지옥의 조교 경수의 새총 시간이 끝이 나고 마루에 앉았다. 정오의 볕에 온 몸을 맡긴다.

"진짜 네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웬. 다리만 왔다 갔다 하며 등은 마루에 붙인 경수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백현의 통수를 바라 보았다. 마치 야쿠자를 연상 시키는 것 같은 용이 새겨진 도포를 입고 있다. 황자가 아니라 태자 같은데...?

"넌 항상 책을 읽었고, 난 새총 쏘면서 제발 나 좀 봐 달라고 했었어."
"같이 한 게 아니잖아."
"내 딴에선 같이 한 거야. 옆에 있어 줬잖아."
"아."
"진짜 넌 몸소 나서서 날 알려 주려 하지 않아."

백현이 어깨 까지 들썩이며 웃는 게 보였다. 상당히 무뚝뚝한 자 였던 모양이다. 높은 건물도, 소음을 일으키는 교통수단도 없는 이 고려 시대는 정적 그 자체 였다. 새들이 날아 다니고 바람에 열어 놓은 창이 잠깐씩 흔들릴 뿐 심기를 거스를 소음 자체가 아예 없었다.

"멍청이란 말도 한 적 없고."

어쩌면, 내가 현실로 돌아 갔을 때. 그 때 어떤 문제가 생길 흠을 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원래 몸 주인이 돌아 오면 백현이 또 낯설어 할 지 누가 아는가. 그렇다면 현실의 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난 과거에 와 있긴 하니까 멈춰 있는 셈이 되는 건가?

"미래엔 비행기 라는 게 발명 돼. 하늘을 날아서 여러 나라를 여행 할 수도 있고, 물건을 운송 하기도 해."
"정말? 무슨 수로 하늘에 뜨지?"
"날개가 있는데 그 양력으로 뜨는 거야. 그리고 난 그 비행기 안에서 일 했어."

... 믿겨져? 경수가 묻자 잠시 말이 없던 백현이 대꾸 했다.

"약간 믿고 싶기도 해."

하아아... 한숨을 쉰 경수가 별 생각 없이 말 했다.

"집으로 돌아 가고 싶어."

여기로 오게 된 계기가 있다면, 돌아 갈 수 있는 열쇠도 존재하지 않을까. 순간 뇌리에 스쳐간 자신을 끌어 안은 채 '사랑하는데'라고 말 하던 백현이 생각나 허리를 단번에 벌떡 일으켰다.

"야 사랑한다고 해 봐."
"뭐?"

눈썹을 팔자로 만든 백현이 뭔가 굳은 결심이 서려 있는 경수를 보다가 얼떨결에 말 했다.

"사랑..."

그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에 흐릿했다. 어?! 머릿속이 아찔해졌던 게 느껴졌다. 비로소 무언가를 알아낸 것만 같았다. 옴짝달싹 하지 못 하도록 백현의 두 어깨를 확 붙잡았다.

"돌아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아. 네가 '사랑하는데' 라고 해 주면 돼."

경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날 돌아 가게 해 줘!"

하지만 그는 웃지 않는다.

"... 싫어."

도리어 경수도 표정이 점차 굳어 간다. 백현의 두 볼은 발그레 했음에도 표정은 어딘가 언짢은 듯 해 보였다.

"왜."
"......"

또 시선을 피한다.

"나 돌아 가면 원래 몸 주인도 오고, 좋잖아."
"당분간만. 잠깐 동안만..."

이유 모를 말만 웅얼 거리며 작아져만 가는 백현을 의문의 눈빛으로 쳐다 보았다. 내가 돌아 가는 게 싫다니?



*



젊은 연애 시절의 백현은 항상 만날 때 마다 달려 왔던 것 같다. 백현 역시 그랬을 테지만, 여지껏 공백이 있을 동안 몇명 정도는 만났었다. 다만 다 일찍들 끝났다는 게 흠이지만. 그 때와 지금의 백현의 공통점이었다면 눈이 마주치게 될 때 마다 달려온다는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무감정 했다는 몸 주인에 비해 난 너무나도 발랄 하댔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내기 싫은 걸까? 오늘 역시 지루하게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시 발'이나 쓰고 있던 참에 황자궁 근처를 기웃 거리는 사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인마."

그 말에 잠시 흠칫하는 듯해 보였다.

"야 인마! 이리로 와 봐."

그냥 몸종이나 되겠거니 하고 불렀는데 인상을 쓰며 황자궁으로 들어서는 모양새가 토끼 불렀더니 용이 들어온... 그런 기분이었다. 혹시 왕건인가. 라는 착각을 할 정도로 더욱 화려한 도포를 입은 사내가 들어선다. 사내가 경수를 발견하곤 활짝 웃으며 다가 온다.

"네가 날 불렀구나."
"그래. 내가 불렀다."

그 말에 잠깐 입꼬리가 죽어 보였던 것 같다. 반말하면 안 되나?

"사랑하는데, 라고 해 봐."
"... 왕연아. 네가 좀 이상하다던 게 진짜 였구나."
"아. 해 보라고."

나뭇가지로 삿대질 까지 해 가면서 명령하는 철부지 황자 동생을 보며 억지웃음을 지은 뒤 말 했다.

"내 이름은 왕무, 종인이다. 네 형님이야."

묻지도 않은 걸 술술 말 하는 걸 보아 하니 날 또 정신병자 취급하는 게 뻔했다. 어차피 뒷감당은 몸 주인이 할 테니까, 그냥 막나가기로 한지 오래다. 몸 주인도 이렇게 살아 보긴 해야지. 경수가 시원찮은 표정으로 노려 보자 음... 이라고 잠시 생각하던 종인이 입을 어렵사리 열었다.

"사랑하는데."
"......"
"......"

아무 일도 없다. 아 젠장~~~!!! 이렇게 백현만이 그 말을 해야 돌아 갈 수 있단 게 입증 되었다. 미쳐 버리겠네. 여기서 기 다 빨리기 전에 돌아 가서 돈 벌어야 되는데.

혼자 막 온갖 쌍욕을 해 대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 코 앞에서 사라져 버린 경수를 보내고 종인은 뭣도 모른 채 이유도 없이 한 대 쥐어 터진 것 처럼 멍... 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정도로 경수의 정신 상태가 양호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



지루하다. 글 공부란 것은 언제 까지 해야 끝이 나는 걸까. 끝이 없는 것을 알지만, 누가 선이라도 딱 그어준다면 좋을 텐데. 글 공부 시간만이라도 원래 주인 불러다 앉혀 놓으면 안 될까. 붓을 입에 문 채 허망하게 시간을 보내려는 경수를 백현이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딴 짓 하지 마."

들은 체도 안 한 경수가 흘끗 공부에 열중하는 백현을 보았다가 조용히 말 했다. 황자들이 한 데 모여 한문을 써 내려가는 시간이라 정자 위는 무척이나 적막 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곳에서 기댈 곳이란 백현 밖에 없긴 하지.

"언제 즈음 말해 줄 거야?"
"무얼."
"사랑하는데."

잠시 붓으로 글 쓰기를 멈추더니 한숨을 뱉어낸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나 애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너랑 생긴 것도 이름도 같아."
"그래서 넌 쉬울지 모르지. 하지만 난 아니야."
"어쩌면 지금 이 몸 주인하고 네가 우리 전생일 지도 몰라. 어떤 생이든 사랑 했다면, 지금 사랑한다고 해도 손해 볼 거 없잖아?"
"넌 내 이복형제야."
"아 그렇지. 야 그럼 더 쉽게 할 수 있는 거 아냐?"
"계속 뭐가 쉽다는 거야!"

결국 백현이 윽박을 내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하나 둘 시선이 접혀들자 백현이 눈치 보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이복형제임에도 그 말이 하기 쉽지 않은 이유.

"네가 안 하면 언제 까지고 내가 여기 머물게 될 거라고."

우는 눈을 짓는 경수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려고 했건만 백현은 이제 완전히 공부에 집중할 심산인 듯 고개도 안 돌려 준다. 그 마음도 모르고 답답함에 책상에 이마만 박아대는 경수를 어찌해야 좋을까.



*



8달 차이로 태어나 연년생인 둘에겐 어려서 부터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다. 형제 또는 자매는 평생을 함께할 최고의 친구라고 이른다. 왕은에게 왕연이란 그러 했다. 말이 없는 성격인 그의 옆에서 까불 거리는 게 내 인생이라는 듯 여겨 그리 구는 게 좋았고, 언젠간 무언가를 함께할 접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왕은이었다. 형제애 라는 게 무서운 것이었다. 붙였다가 말끔히 떼면 끝인 평범한 정과는 달랐다. 나이가 들면 들 수록 그 인물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게 되는 게 아니던가.

죄악인 이 감정을 이겨내려 하려고도 하며 가슴을 쥐어 뜯어 보아도, 자꾸만 네 궁으로 향하는 걸음은 갓 핀 꽃의 꽃잎을 뜯어 날려 놓곤 즈려 밟는 것 처럼 나를 짓이기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하려면 내가 용기가 있을 때, 그 때 내가 단단해졌을 때 하려던 말이.

네 가면을 쓴 누군가가 나로 부터 바라고 있다. 이기심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 말을 하고 싶어지고 있고, 더욱이 이 나를 알 리가 없는 네게 미안해지는 것도 이기적인 듯 싶었다. 진짜 왕연인 너는 내가 그 말 하길 바라지도 부탁 하지도 않을 텐데, 겨우 내 욕망 하나 채우려고 사랑이 들어가는 말을 원하는 가짜에게 마음 고백하는 게 정말 다음날 돌아올 너를 위해서도 해도 될 일인가.

가짜 왕연을 만나고 나서 부터 느낀 것이온데, 왕연이 엄청나게 과묵 했던 자 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모습이 낯설긴 하여도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간 왕연의 모습과 전혀 대조 되지가 않아서......

왕연아. 날이 갈 수록 네가 보고 싶어지지 않고 있다.

아주 오래 전 부터 그의 낙원에 흐트러졌던 것 처럼 홀로 망가진 자신을 바라 보았다. 오늘도, 가짜 왕연을 만나러 간다. 겹겹이 옷을 입혀 주는 손길을 받아내면서도 오롯이 그 생각 뿐이었다.

눈동자 까지 달라진 왕연에게 더 욕심을 부리려는 나를 그 몸 안에서 보고 있는 거라면 모른 체 해 다오. 네가 날 증오하려 들며 멀어지는 것 또한 나에겐 연시미행이고, 내 진부한 마음을 숨길 무언가를 주는 것이니.



*



"무슨 개 소리야?"

경수가 차를 뿜을 뻔한 것을 겨우 면했다. 그에 반해 평온함을 유지하는 종인으로 부터 의심을 눈초리를 보냈다.

"그 자식을 가까이 두지 마."

나도 들은 바에 따르면 모든 황자들도 널 싫어 하는 것 같던데. 왜 하필 날 부르고 염병이니. 귓구멍을 후비며 식은 차를 한 번에 입에 넣어 꿀꺽 삼키는 모양새를 보아 하니 종인은 적잖게 놀랐다. 평소엔 말 한 마디 듣기 힘들던 놈이 풀어진 자세에 험한 입담.

"그니까 네 소리는, 왕은이 장가 가는 데 내가 해가 되니까 떨어지라고?"
"그런 셈이지."
"장가 가는 건 걘데 내가 왜. 다같이 친한데 너만 동떨어지니까 샘 나서 그런 거야?"

정곡이 찔린 종인이 눈을 희번뜩 뜨며 주먹을 쓰다듬었다.

"형님으로서 조언해 주는 것이다. 네 둘이 붙어다니다 이상한 소리만 돌면 어느 가문이 받아 줄 것 같아?"
"받지 말라지 뭐. 황자가 한두 명이냐."

다과상 따위는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경수는 차에만 입을 대고 있고, 종인은 그 무엇도 손 대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과거가 더 살기 편한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숨만 쉬면 장가 와 달라고 콜이 들어 와... 옷 입혀 줘 밥 차려 줘... 심지어 맨날 놀아. 그 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백현이 안으로 들어섰다. 심술이 난 얼굴로 경수의 손목을 잡아 일으킨 채 나가려던 등 뒤로 종인이 말 했다. 차라리 둘 모두 묶어서 없애는 건 어떨까, 하는 망상이 들었다.

"이복형제를 사랑하나?"

서로를 쳐다 보고 있지 않지만 대강 눈빛이 어떠한지는 알 것 같았다. 하나 라도 더 없애고 싶어서 안달이 난 황국의 예비 우두머리.

"상관하지 마십시오."

얘는 존댓말을 하는구나. 이끌리면 이끌리는 대로 손목이 잡힌 채 따라 걷는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굳이, 여기 까지 온 것이고 어디서 듣고 온 것인가. 백현이 표정을 풀지 못 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채고 어떤 식으로 궁지로 몰아 붙이려는 속셈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또 황자 중 유일하게 신중하고 지식이 투철 했던 경수를 곁에 두기에 탐했던 저 흑심에 넘어 가게 둘 수는 없었다.

별 것도 아닌 이유로 부터, 속상하고 섭섭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고 서러웠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이 가짜 왕연에게 매달려야만 한다는 게 정녕 내 운명인가.

'이복형제를 사랑하나?'



*



"이복형제를 사랑해?"

갑작스레 물어 오는 경수 때문에 손에 들려 있던 서책을 바닥에 떨구었다. 예상 보다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에 한 걸음 뒷걸음 친 경수에게 백현이 무표정으로 다가 섰다.

"왜 그런 걸 묻지?"
"그래 보여서."

도저히 그 왕연 보다 지금의 가짜 왕연을 더 좋아 한다고 말 할 수 없었다.

"......"

내가 그 말만 했다 하면 사라질 사람. 제자리로 돌아가 서책을 다시 주워 들었다. 곧 보내 줘야지. 저 자가 원래 살던 곳으로. 곧, 곧이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나무가 잔뜩 세워진 길을 산책하던 도중에 맥아리 없이 쓰러진 왕연이 잘못 된 것은 아닐까 생각되어 눈물이 핑 돌았었다. 말 없는 사람이 몸 까지 사라진다면 절망적일 것만 같았다. 벚꽃잎이 콧잔등에 내려앉듯 감겨 있던 눈이 스르륵 올라 가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형제를 무슨 수로 사랑하나. 것은 죄이지."

난 죄인이다.

"그래? 기분 나빴음 미안하고... 태자 놈 진짜 진상이네."
"만약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어떨 것 같아?"

갑자기? 머리에 들어 오지도 않는 한자로만 수록된 책을 덮은 경수가 궁상맞은 질문에 대꾸 했다.

"네 말 대로 죄겠지."

형제라서, 다음은 정말로 사랑해서. 말을 꺼내지 못 하는 것은 저것 포함 하나가 더 있다. '돌려 보내고 싶지 않아서'.

"네 세계의 백현은 내가 아니잖아. 이곳에 머무는 너 또한 네가 아니고. 어쩌면... 진짜 전생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
"어차피 넌 돌아갈 테니 내 비밀 하날 말해 주겠는데, 맞아 왕연을 좋아해. 언젠간 말 할 테지만 아직은 용기가 없어. 죄이고, 난 죄인이 되니까."
"거 봐."
"그런데 지금은 말이야..."

책 냄새 가득한 곳. 도서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종이 냄새가 더 강렬 했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 가면 다 돈 아닌가 이거... 어느 순간 부터 책 냄새가 아닌 돈 냄새로 맡아질 때 였다. 그 무엇도 아니고, 이건 타는 냄새다. 말을 끝 까지 잇지도 못한 백현의 입을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탄내가 나."

그제서야 백현도 감지한 듯 주위를 둘러 보기 시작 했다. 나무 천지인 여기서 불이라도 난다면.

다 죽을 것이다.

불안한 냄새의 출처를 찾아 달리는 백현의 달음질이 멈춘 곳에 경수가 따라 멈추었다. 망연자실하게도 입구 였다. 불길은 점점 커지고 있었으며, 부담스러워 하는 경수 때문에 모든 신하들은 물러 놓은 상태 였다. 결과, 존재하는 것은 갇힌 저와 경수 라는 것 뿐이다. 불길은 옮겨 붙고, 옮겨 붙어 몸집을 더 키우고 있었고, 동공에 비춰진 붉은 일렁임이 둘을 위협 했다.

"나가야 해."

어릴 적, 늦은 밤 꺼진 등불 아래 눈을 감던 때 보다 더 두려웠다. 손목도 아닌 손을 꽉 잡은 채 가장 깊숙한 곳으로 달리는 백현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경수도 마찬가지 였다.

"갑자기 무슨 불이 나!"
"태자 짓인 것 같아."
"이 쒸벌...!"

구석에 도달하긴 하였지만 습도와 온도 조절을 위해 방범용으로 기둥 여러개를 세워 막아진 작은 창 하나가 전부 였다. 기둥을 없앤다 한들 성인 한 명이 빠져 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틀렸어..."
"뭐가 틀렸단 거야. 너 이대로 죽어도 괜찮아? 아니잖아!"

막무가내로 기둥을 부수려 드는 경수를 붙잡았다. 눈이 마주치자 백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쩌려는 거야. 활활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가까이, 점점 가까이 빠르게 다가 왔다. 불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둘 다 죽어도 괜찮다 이거냐고."
"아니. 넌 돌아 가."

붉어진 눈시울로 하고 말한 그 목소리에 사고가 멈추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돌아가 버리면 너는. 그렇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왜.

"그동안 잘 지냈어. 만약 너의 세계로 돌아 갔을 때, 나를 만난다면 그냥 힘껏 안아 줘. 그렇게 라도 만족할게."

경수의 목을 감싸 안아 온다. 불을 등진 채로, 불은 보지 말라는 듯이. 심장이 겹쳐 오면서 박동이 섬세하게 들려 왔다. 이렇게 잠깐 뜨고 젖어 버릴 종이배 처럼 말 하는 백현이 원망스러웠다. 난 네게, 돌려 보내 달라고 칭얼 거린 것 밖에 없는데 뭐가 이리도 슬프지. 왕연을 향한 어리숙한 진심이 닿아 온 것 처럼 벅차오름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를 안은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사랑하는데......"

네 사람의 몸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네 사람의 얼굴로 '사랑'이란 단어를 고파해서 미안하다. 또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한참을 내 의지로 걷지도 않았는데 막 이리저리 치여 다니듯 휘청이며 어둑어둑한 미로 속을 헤치다 눈을 번쩍 떴다.

"경수야!"

또 백현이었다. 하지만 난 울고 있었다. 오랜 수면에서 깨어난 듯 몸은 무거웠고, 주구장창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아낼 수 없었다. 하얀 천장, 그리고 백현. 내가 한문으로만 쓰여진 책이 궁금하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그랬지만 않았어도. 그의 바람 대로 코 앞에 있는 백현을 끌어 안았다. 그리곤 한참을 울었다. 원래 주인이 들어 갔거나, 아님 비어 있거나 할 몸뚱이를 안은 채 불길 속으로 사라질 네가 떠 올라 더욱 울컥 차 올랐다.

모든 게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



수면실에서 잠에 든 이후 1시간 뒤 백현이 깨웠지만, 깨어나질 않아서 깊이 잠든 탓이구나 싶어 동료 연지에게 미리 말해 둔 뒤 백현은 자리로 돌아 갔다. 그리고 이륙 할 때 까지도 눈을 뜨지 않던 경수는 결국 응급실로 이송 되었고, 얼마 뒤 따로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출국하여 입원 했다. 2주가 걸렸다 한다.

내가 눈을 뜨기 까지.

아직도 하늘을 바라 보다 새들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아래를 쳐다 보게 된다. 그럼에도 건물 가득한 이곳을 알아채면 그게 꼭 꿈은 아니었단 생각이 든다.

의사는 말 했다. 조금 더 버티지 못 했다면 평생 눈을 뜨지 못 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조금만 더 그곳에 머물렀다면 이곳으로 넘어 오지 못할 거란 말인 것 같았다.

기록을 일부로 살피지 않았다. 만약 정말 그가 불 타 죽었다면 잔인한 짓을 해 버렸단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날 그 시각에 왕은이 죽는 게 예견된 일이라면, 그 시각 돌려 보내려는 날 위해서 사랑한다 말해 준 게, 모두 애초에 내가 고려로 보내진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왕은은 평생 할까 말까 하였던 말을 비록 가짜여도 왕연에게 했으니까. 그것으로 이미 한은 푼 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자책을 회피 하려는 자기합리화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편으로 소설이라도 써 놓는 게 그들에게 해피 엔딩이 아닐까 싶다. 지금도 백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면, 그 때 마다 숨이 턱 턱 막혀 온다.

"경수야!"

오늘도 나에게로 달려 오는 백현에게 두 팔을 들어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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