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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블루 오션

기도 冀圖 2017. 2. 25. 22:00
+) 최종 수정 01:15 완료 하였습니다. 빠른 개선을 보여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을 때 맛 들인 게 담배 였다. 그저 핑계에 불과 했지만은 어이 없게도 사람도 아닌 것에게 위안을 얻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바라는 것은 가고 싶은 길도 정하지 않았는데 오로지 성공 뿐이었다. 이 열여덟에 꿈도, 희망도 있지 아니하고 아픈 기억만 수두룩한 게 내 또래에 몇이나 있을까. 자켓 주머니를 뒤적이며 담배갑을 찾았다. 학원이 끝난 후엔 항상 해가 저물어져 있다. 자욱한 밤공기 가득한 시내 거리는 항상 경수를 달랠 수 없었다. 걸어도, 뛰어도. 혼자 라는 외로움만 가득 했기에. 학원 건물을 나와 바로 앞에서 한개피를 물어 빼려는 경수의 옆으로 부터 하얀 담배 연기가 볼 언저리를 덮어 온다.

"비가 오네."
"......"
"고등학생 같던데."

오늘도 피우네. 경수가 고개를 돌렸다. 웬 처음 보는 수트를 입은 남자였다. 게슴츠레 뜬 것은 아니지만 왠지 사연 있는 눈을 뜬 남자는 전에도 매번 학원에서 나와 담배를 태우는 경수를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저 눈은 사람을 야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변태예요?"
"나도 퇴근 하면서 항상 여기서 피우거든. 착각 하지 마."

어딘가 떽떽 거리는 듯한 말투에 그닥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불을 붙인 뒤 빨아 들이자 두통이 그나마 가시는 듯 했다.

"얼라리? 담배 다시 넣을 줄 알았는데."

남자가 빙글 거리며 말 한다. 몸은 어째 아까 보다 가까이 온 채.

"제가 왜 아저씨 눈치를 봐요."
"보기 드문 당돌함이야. 친구 먹을래?"

혹시나 싶어 물었다. 별 관심은 없지만.

"뭐 하시는데."
"변호사. 왜,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이래도 돼요?"
"내 앞에서 추상적인 생각은 금지야."

양아치상인 얼굴과 달리 단정하게 꿰어진 단추 부터 목 끝 까지 매어져 있는 넥타이가 모순적이어 보였다. 이젠 별 생각 없어졌는지 경수가 담배를 떨구어 짓밟았다. 그러자 남자도 따라서 꽁초를 저쪽 한 편으로 던진다. 저러다 사람 맞음 어쩌려고. 경수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 건물 5층 아저씨 사무실인데 심심하면 놀러 와. 내가 네 얼굴 아니까. 구라 아니니까 장난으로 들으면 안 된다."

대신 실내 흡연은 금지, 고객들이 싫어 해. '고객들이'에서 코를 찡그리며 웃은 남자는 자켓을 머리 위로 뒤집어 쓴 뒤 옆편의 주차장으로 뛰어 갔다.

... 찌질이. 내 손에 들린 우산 봤으면서. 연초에 이게 무슨 비 벼락인지 몰라도 현재는 이틀 내내 비가 오는 중이었다. 다른 지역들은 눈 오던데, 차라리 눈이 나았다. 갑갑하게 추적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옷이 젖는 것도, 반지하인 집안에 습기가 차는 것도, 심하면 물이 차는 것도. 손바닥을 내어 보았다. 내리는 빗줄기가 진짜 거셌다. 손을 뚫을 기세로 내리는 비를 보고는 또 한숨이 흘러 나왔다.

우산을 펴 건물을 나서면서 무심결에 5층을 올려다 보게 되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 머릿속은 다른 모양이었다. '변백현 법률 사무소'. 물론 그 사무실의 존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건물 자체도 넓직하고 한 층의 높이 마저도 매우 기다랗기 때문에 보통 사무소가 아니란 것 즈음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또 기세등등한 사람일까. 실실 웃는 꼴만 봐도 돈복이 어느정도 터져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여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자본, 난 결국 그 세계에서 내동댕이 쳐진 조무래기다.






백도 블루 오션
/기도 씀






달그락 달그락. 식기들이 부딪히면서 백색소음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은 개교기념일이었다. 허나 나갈 일이 없어 학원 타임만을 기다리느라 낮잠 부터 해서 오늘만 몇시간을 잠에 취해 있었던지 모르겠다. 잇새로 연기를 분 경수가 담배 필터를 살짝 깨물었다. 우선 설거지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샤워야 대충 잡아 보았자 15분. 그리고 수업 시작 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 할 짓도 없으니 그 아저씨 사무실이나 놀러 가 볼까. 횡패 한 번 부리면 다신 아는 체 안 하겠지.

집에 혼자 고립되게 된 이후로 경수는 더이상 피시방도 다니지 않았고, 최대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로 할애하지 않기로 하였다. 나라에서 주는 용돈 같은 돈으로 매일을 살고, 숨통을 트일 수 있게 한다. 벌써 부터 살아 남기 위해선 장학금을 받는 수 밖에 없었다. 꿈도 무엇도 존재하는 평범한 남고생으로 살기엔 이미 틀려 버렸다 이 말이다.

그릇을 정리하고 난 뒤 까맣게 타 들어간 꽁초를 쓰레기통 안으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비 때문인지 집안은 역시나 습했고, 다행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집이 좁아서 거실 겸 침실을 쓰는데 이불을 포함한 모든 게 수분을 머금어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빨래도 빨리 안 마르고.

원래도 형편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가족 모두가 사고로 세상을 잃었을 때, 나 역시도 전부를 잃은 거나 마찬가지 였다. 내 숨이, 내 집이, 내 가족이. 그렇게 두달을 죽은 사람 처럼 지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알았다. 이리 사는 들, 내가 죽지 않는 한 평생 이럴 것이라고. 내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질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나를 일으킨 것은 나다. 그래서 일어섰다.

...... 막상 그러고 나니 하나도 힘들지가 않더라. 지난 것들이 너무 허상 같아서, 그래서 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저 눈 앞에 있는 현실을 믿고 미래에 다가 가는 것이 경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거실에 나오니 너무나 적막 했다. 또 눈물이 나려고만 하였다. 열여덟 먹고도 어리고 여리고, 여트막하게 나마 약속 했던 '난 성숙하다'라는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항상 티비를 틀어 놓는 것은 버릇이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돌지도 않는 한기가 뼈속 까지 파고 드는 것 같아서. 전에 엄마가 사다 줬던 야구 점퍼를 반팔 위에 덮어 입은 채 가방을 매고,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담배갑을 주머니 안으로 챙겨 넣었다.

딱히 쓸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나와 이웃 주민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단지를 나선다. 길가에 나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며 시내로 나아간다. 계속 이렇게 땅만 보다가 걷다 20분 즈음이 지나면 학원 건물이 나온다. 굉장한 번화가에 자리해 있는 학원비만 해도 한달 생활비 반절이 깨진다. 별 수 있나, 이 학원 만한 데도 없는데.

계단을 오르려다 잠깐, 아주 잠깐 망설였다. '오란다고 진짜 오네.' 이런 반응을 보이며 사람을 엿 먹이려는 속셈이면 어떡하지. 빙글 거리는 낯이 생각나 경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여섯 걸음만 내딛으면 문 앞으로 다가설 수 있다.

"후-"

문 바로 앞으로 발을 디디려던 순간 사무소 내부로 부터 호통이 들려 왔다.

"네가 구멍 낸 거나 마찬가지 라고!!!"

문을 슬며시 밀어내니 더욱 크게 들려 왔다. 얼핏 그 아저씨 목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양부모가..."
"양부모든 친부모든 씨발 그게 무슨 상관이야. 안 해. 집어 치워."

동공에 비추어지는 아저씨는 서류더미를 한 남자에게 무자비하게 던지며 우악시러운 어투를 사용 했다. 어쩐지 겉보기에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었나 싶었다. 얼굴 부터 귀 까지 벌게져선 화를 이겨내지 못 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 멍을 때리다 한 여자가 경수에게 다가 오려고 하자 냅다 사무소를 빠져 나왔다. 괜히 온 건가 싶었다.

빠져 나온 발걸음 그대로 윗층인 학원으로 올라 섰다. 휴게실에서 자습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한창 경수 전 타임의 수업이 진행 되고 있을 학원 안은 적막으로만 가득 차 그 무엇도 경수를 반기지 않았다. 애초에 친구랑 같은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 왔다. 머릿속엔 공식이 아니라 분노에 찬 아저씨와 어젯밤의 아저씨가 자꾸만 대조 되었고, 그렇게 한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다.



*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며 일상 처럼 담배갑을 꺼내었다. 어서 피우고 집 들어 가야지. 길거리 흡연도 예의가 아니었고, 집에 갈 때 까진 담배가 말려서 못 참을 것 같았다. 항상 그랬다. 입구 문을 밀면서 불을 붙인 경수가 연기를 불며 담배갑을 주머니 안으로 도로 집어 넣었다. 설마 하며 주변을 둘러 보지만 그 괴팍한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전엔 본 적도 없던 것 같은데, 어떻게 날 귀신 처럼 알아채고 있었을까. 그나저나 그 아저씨도 내 이름을 모르고, 나도 아저씨 이름을 모른다.

얼굴만 본다면 빼박 20대인데 아저씨란 호칭이 입에 착 붙는 이상한 사람이다. 날이 좀 무거웠다. 비가 오고 난 다음날이어서 이런가 보다. 경수는 학원을 마치고 한 개피를 태울 때면 머릿속을 비워내려고 했다. 학습 내용 말고 그 날 받은 스트레스를. 오늘은 학교도 다녀 오지 않았는데 묘하게 머리가 무거웠다.

"불 좀 주라."

아. 경수가 탄식을 하며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죽 웃어 버리는 그가 있었다. 잠시 무표정 하던 경수가 입을 열었다.

"이름 알려주면요."
"변백현."

역시나 이 아저씨가 사무소 머리 였구나. 헌데 조촐하게 여기서 고삐리랑 맞담배나 하고 있는 꼴이 백현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어디 까지나 경수의 눈높이이니 경수 역시 그러려니 하였다.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갑 안에 든 라이터를 꺼내려 담배갑을 꺼내려는 순간, 백현이 불쑥 다가와 손바닥으로 살살 부는 바람을 막곤 경수의 담배 끄트막에 제 담배를 가져다 대었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놀란 경수가 벙찐 상태로 일그러진 백현의 미간을 보았다. 그러곤 막상 자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인지 건조하게 쓴 연기를 들이킬 뿐이다.

그닥 놀랐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는 것 같아서. 먼저 도발해 낸 백현 처럼 경수 또한 별 반응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아까 화 내고 있던데."
"왔었어?"
"놀러 오라고 했음 가야죠."
"이정도로 충견일 줄은 몰랐네."
"다짜고짜 왜 개 취급을 해요. 왜 화 났냐니까요."

백현은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하는 듯 '으으음'이라고 소리를 길게 내었다. 어제와 같은 차림이다. 넥타이도 똑같이 검은색. 경수는 언젠가 백현을 스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 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그도 나를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에 괜히 군침을 삼키게 되었다.

"곧 재판이 하나 있는데, 그거 때문에. 작은 트러블이야."
"그런데 그렇게 역정을 내요?"
"성격은 불변이라잖냐. 어쩔 수 없지. 내 아래서 일 하려면 다들 정신 병원 하나 씩은 끊어야 해."

극한 직업이 따로 없네. 경수의 웅얼거림에 백현이 호탕하게 웃었다. 건물이 떠내려 가라 웃는 바람에 모든 시선을 받게 되어 저도 모르게 경수가 백현을 퍽 하고 밀었다.

"아, 사람 쪽팔리게. 저리 가서 웃어요."

그 말에 백현이 더 낄낄 웃으며 골반으로 경수를 약하게 쳐 대었다. 좀 지나고 나선 이번 것도 그러려니 하며 당하고만 있다 보니 담배가 완전히 꽁초가 되어 있어 옆골목 쪽으로 툭 쳐내듯이 던졌다. 밤은 짙고 밤 구름은 눅눅 했다. 언제 또 비가 갑작스레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 사이에 끼워 들고 다니는 접이식 우산이 필요 없겠단 생각에 웃고 싶어졌다.

"난 이런 날이 좋더라. 비 오고 난 후. 정확히 설명은 못 하겠는데 그냥 기분이 좋아. 고딩, 드라이브 갈래?"
"고딩이 아니라 도경수요."
"경수. 갈래?"
"아저씨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증명하면요."
"난 믿을 인물이 못 돼. 그래서 네 의견을 묻잖냐."

경수가 뻐근한 듯 고개를 양 방향으로 기울였다.

"그러시든가요. 2시간 이상 안 달리면 도로 집으로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백현이 따라 오라며 고갯짓 했다. 혼자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경수는 알뜰함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짜진 않으면서도 달큰하게. 이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사고가 있은 후 단 한 번도 택시를 타 본 적이 없다. 걷거나, 지하철 또는 버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이동 시간은 늘었지만 삶에 여유가 자리를 잡았다고 해야 하나. 뭐든 일찍. 약속에 늦지 않도록, 또는 등교 할 수 있도록.

비싼 외제차 답게 승차감은 끝내 주더라. 얼마 만에 타보는 자가용일까. 그래도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매는 경수를 보곤 백현이 시동을 걸며 무거운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세단 치곤 안이 꽤나 쾌적 했다. 경수는 그저 뒷통수 까지 기대고 창문 밖을 주시 했다. 저녁 8시의 바깥은 이제 막 디너 타임이 지나 남은 요기를 채우려 하거나 만남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았다.

중학생 때 처럼 친구들과 피시방을 다니고 공부란 게 그렇게 중요치 않다는 것으로 여길 때 였으면 아마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비로소 혼자가 됨으로서 주변은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나도 모르게 혼자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상태로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책임지게 될 거란 생각에 가끔 머릿속이 멍해지곤 한다.

"요즘 이혼 소송 많아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놓고 말 하는 경수를 흘끗 쳐다보았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린 백현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대꾸 했다.

"많지. 항상 많아."
"... 혼자 살까 봐요."

경수가 오른팔을 창문틀에 올리며 볼을 괴었다. 차라리 이렇게 라도 매일 누군가와 있을 수 있는 게 나았다. 귀가 하면 맞이해 주는 것은 까마득한 터널 같은 어둠 뿐이고, 동물을 키워 볼까 싶었지만 자신 하나도 돌보질 못 하는데 무슨 발상이냐며 금세 반성 했다.

백현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며 물을까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실까?"
"고아예요."

아, 어... 말끝을 흐렸다. 실수해 버렸네. 이만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에 백현이 블루투스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변백현 입니다."
-접니다.
"왜."

익숙한 목소리에 인상을 구겼다. 분명 하려는 이야기는 같을 텐데.

-그쪽에서 자존심이 구긴 모양 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자태가 아닌 것 같아서요.
"왕족이야 뭐야. 내가 그 새끼 변호 안 한다고 했음 다른 집을 가든지 법 대로 바로 쳐 넣든지 알아서 하라 그래."
-...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돈만 보고 안에 넣지 말라고."
-예. 하실 말씀 있으심 전해 드리겠습니다.
"깔-끔 하게 변호 포기."
-참고 하겠습니다. 안전히 귀가 하십시오.

전화가 끊기자 아, 하며 주머니를 뒤적인 백현이 경수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건네었다.

"번호. 전화 해서 너도 저장해."
"......"
"오기 전에 연락이라도 하라고. 화 식혀 놓을 테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으름장을 놓자 경수가 '안 했거든요.' 라고 답을 놓은 뒤 액정 위로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아무리 들어도 방금 전에 통화 내용이 오후에 화를 냈던 내용과 같지 않을까 라는 궁예를 해 보았지만 관심을 두어서 무얼 하나, 경수는 그만 두었다. 그냥 누군가와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려고 했다. 난 이 아저씨를 믿고 있을까. '변호사' 라는 직업에만 치우쳐져 나도 모르게 기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 했지만, 아무래도 변호사가 아닌 변백현이라는 이 사람을 믿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알게 된지 이틀만에 입을 털었던 것 같다.

"교통 사고로 다 죽고 혼자 남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슬프지도 않더라고요. 사고 낸 놈은 다친 데 없이 떵떵 거리고 있고, 난 거지 꼴 나서 반지하에서 겨우 살고 있고."
"보험금, 합의금은."
"도리어 털렸죠. 그래서 공부하는 거에요."

윗대가리들 한테 더이상 안 털리려고. 그 말에 백현이 코웃음을 치며 말 했다.

"나랑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도. 나도 윗놈들이 권력남용 하는 거 족치는 게 취미거든. 경수도 속 얘기 했으니까, 아저씨도 할게."
"... 그러세요."
"우리 로펌은 이노 그룹 일도 가끔 맡아. 알아?"
"아뇨. 관심이 없어서."
"그렇구나. 사내에 있는 변호사 팀은 회사 일을 맡고, 우린 그 집 사람들을 맡고. 대충 자잘한 일만 치우면 됐는데 요즘에 좀 난리야."

보통 소란스러운 게 아니라며 투덜 거리면 백현의 말을 듣고 있자 하니 어쩔 수 없는 투덜쟁이인 직딩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훅 지나가 버렸고 서울 외곽 어딘가를 돌아 왔는지도 모르게 어느새 경수는 자신의 집을 어디로 가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지시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편하네요. 아저씨는."
"내가 마음에 드나 보다."

얍실하게 웃는 바람에 경수가 질색을 하며 문을 탁 닫았다. 창문을 내린 백현이 고개를 숙이며 말 했다.

"바로 샤워하고 자라, 경수야."
"알아서 잘 합니다."

또 방긋 웃는 백현은 그대로 악셀을 밟아 단지를 빠져 나갔다. 그 꽁무니를 끝 까지 보던 경수가 천천히 뒤를 돌아 집으로 내려 갔다. 가슴이 가만히 있질 않았다. 담배가 말려서 그러나. 집으로 들어서며 안절부절 다급하게 담배갑을 찾는 경수의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재롱 부린다며 비웃을 일이었다.



*



백현이 근질 거리는 손을 데스크 아래로 내렸다. 다시 한 번 올렸다간 상대방의 관자놀이를 가격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사무실 내부는 비교적 한산하고 봄 기운 그득한 인테리어 때문에 분위기는 가벼웠지만 인적인 분위기는 그러지 못 했다. 현우가 비죽 웃었다.

"왜 벌레 보듯 보시나요?"
"입장 확실히 밝혔습니다."
"세 배로 지급한다 해도 같으시겠죠? 저희하고 오래 일 하신 분이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저는 잘......"
"사람은 판단이란 걸 해요. 그걸 못 하면, 머리가 고장 났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 거에요. 사장님, 바보 아니시죠?"

현우 입장에선 다른 로펌과 연결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면 회사 대로, 집안이면 집안 대로 비리가 가득한 마당에 유출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아니, 변 변호사 님 껜 변호를 부탁 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습니까?"
"여긴 제 로펌이지 않습니까? 사장님이 거느리는 사파리가 아니란 걸 저번 때 말씀 드린 것 같은데."

현우가 얼굴을 굳히자 백현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한다.

"저희가 사자 라고 해서 던져 주는 고기 다 받아 먹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도련님 이번 것은 확실히 처벌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노 그룹의 대표 아래엔 2남 1녀가 있는데 그 중 막둥이인 차남이 기여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학생인 미성년자 신분에 클럽 출입, 주민등록증 위조와 음주, 불법 수입 마약 소지 등. 다소 업적이 많으신 귀한 몸이 한 업체에서 찍힌 사진 몇장으로 인해 그룹이 휘청할 위기 까지 오고 만 것이었다. 심증, 물증 확실한 상태에서 백현은 더이상 그 사건에 휘말려 들고 싶지 않았다. 진실을 거짓으로 덮고 거짓을 진실 같은 거짓을 덮으려 하는 게 변호사 인생 중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태 사건들을 치워 주었던 것과 달리 다른 태세를 보이는 것 때문에 이 누추한 사무실 까지 대표인 현우가 출두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것도 '부탁'을 하려고.

"당신, 책임 질 거야?! 우리 망하면 그 전에 너 부터 죽을지도 몰라."
"차라리 로펌을 옮겨 주십시오. 도련님만 들이밀지 않으신다면 눈 꼬-옥 감아 드리겠습니다. 이노 변호사팀 처럼요."

비꼬는 듯 놀리는 듯 빙글 거리는 백현에게 계속해서 매서운 눈총을 쏘아 대던 현우는 그만 코 앞에 놓여 있던 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행여나 유리 조각이 튈까 바로 경호원들이 엄호 했지만 오히려 유리 조각이 튄 방향은 백현 쪽이었다. 살짝 스쳐 지났지만 길게 붉은 기가 나와 옆에 서 있던 세훈이 안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상처의 피를 살살 닦아 주었다. 백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살갑게 웃으며 말 했다.

"조심히 들어 가세요, 대표 님."
"너 하나 없애는 게 일인 줄 알아? 날 벌레로 본 거, 내 아들 쓰레기 취급한 거 모조리 다 갚을 거야."

이젠 남이라고 말도 놓으시네. 속으로 웅얼 거린 백현이 볼을 닦는 세훈의 손길을 받으며 경호원을 대거로 데리고 사무실을 나가는 현우를 지켜 보았다. 마침내 모두가 빠져 나가자 백현이 문을 향해 중지를 쳐 올렸다.

"죽여라 시발 놈아."
"살짝 스쳐서 다행 입니다. 연고 사 올까요?"
"됐어. 있어."

백현이 세훈의 손을 내치자 '아, 예.' 하며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갔는데도 아무 일 없던 듯 홀로 평안한 백현의 눈치를 보아하니 정말 '다친 데만 아프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는 듯 했다. 이제서야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멈춰 있던 숨을 편하게 쉬는데 '죽이겠다'라는 협박과 핍박 까지 받은 백현은 정작 약이 어딨냐고 노래나 부르고 있다니. 이노 그룹은 이래 뵈도 사성 그룹 하고 맞먹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인데, 설사 백현이 죽는다고 해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그 기업은 또 성장해 갈 것이 분명 했다. 백현의 데스크로 쫄랑쫄랑 다가간 세훈이 무릎을 쪼그리고 서랍에서 약을 찾는 백현에게 소근소근 말 했다.

"심각한 거 아닙니까?"
"조무래기 새끼가 뭘 하겠다고."
"다른 변호사 분들도 노출 됐잖아요."

와중에 백현이 약을 찾자 바로, '발라 드리겠습니다.' 하며 약을 받아 드는 세훈의 충성적인 비서 정신에 백현이 푸핫 하고 웃었다.

"경과 지켜 보고."

의자에 푹 눌러 앉아 눈을 감는 백현은 항상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었다. 본 적 없는 리더쉽에 능력에 많은 사람이 모여 들며 세훈도 자처해서 아래로 들어 왔지만 간혹 가다 그를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몇년을 보아도 백현은 항상 새로운 기분이 들도록 하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우선이에요. 다른 분들 안전도 평소 보다 특히 주의 기울일 테니까, 사장님도 조심 하세요."
"넌 걔네가 무섭더냐?"
"무섭죠. 코 앞에서 기업이 막 걸어 다니는데. 도청 장치도 두고 간 거 아니에여?!"
"너 침착하게 안 굴면 월급 삭감이라 했다.
"죄송합니다..."



*



"연지 씨 들어 오고 첫 일이네. 열심히 하세요."
"네 사장님."

웃어 주며 연지를 돌려 보낸 백현이 의자를 돌려 바깥을 내려다 보았다. 5층 치곤 경관이 봐 줄만 했다. 건물은 물려 받은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건물의 명의는 백현. 딱히 변호사를 하지 않아도 이 큰 건물을 거느리고 있자면 배 터지게 먹고 죽을 때 까지 놀아도 될 테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백현의 아버지 몫이 컸다. 사람이 게으르면 안 된다고, 늘 말씀 하셨다. 가진 것 있다고 팔자 늘어지게 사는 것도 도리가 아니고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여도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게 아니라고 세살배기를 옆에 두고 귀에 굳은 살이 박혀라 잔소리 하셨었다.

"아."

세훈을 호출한 백현이 휴대폰을 보며 포스트잇에 번호 11자를 써 내려 갔다. 다름 아닌 도경수의 휴대폰 번호 였다. 얼마 안 돼 바로 들어온 세훈에게 포스트잇을 건네며 일어선 백현이 주머니 안으로 두 손을 꽂았다.

"만일 나 한테 무슨 일 생기면 거기다가도 연락 넣어."
"가족이십니까?"
"가족은 아닌데, 가족 같은 동생."

세상은 너무나 피폐해졌다. 이 형태를 초래한 것도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의 백현은 세상이 이대로 언제 까지 굴러 먹을 수 있을까 하며 경우수를 던져 보곤 한다.

"알겠습니다."
"세훈아."
"예 사장님."
"내가 정말 죽으면 어떡할래?"
"그 땐 이미 저도 같이 죽어 있지 않을까요."

너무나 단정한 대답에 백현이 헛웃음 소리를 내었다. 나의 이 단호하게 일방적으로 지어버린 결과가 주변에 이런 영향을 주고야 말았나. 가 보라는 말을 끝으로 앉은 백현이 사무실 안에서 흡연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편하네요. 아저씨는'

나도 편해 네가. 항상 뒷트막에서만 보던 뒷통수가 앞통수로 바뀌었다. 매번 나와 같이, 같은 시간에 담배를 태우는 넌 어쩌면 어른인 내가 흡연을 제재 할 법도 했는데 속 얘기를 듣게 될 것을 이미 알았던 것일까 먹먹해진 목구멍 안에서 그 말이 바깥으로 내뱉어지지가 않았었다.

'시간이 지나니 그렇게 슬프지도 않더라고요.'

시간의 흐름을 우리가 마음 대로 정할 수도 있는 게 아니었다. 시간이 무조건 약일 수도 없는 것인데 혼자 이겨내려면 얼마나 아픈 세월을 거느려야 했을까. 언제 부터 남 인생에 관심이 많았을까. 한 개피를 또 꺼내든 백현이 불을 붙이면서 데스크 위에 있던 볼펜을 굴리더니 볼펜이 바닥으로 떨구어진다.

뭐 하러 '편하게'라는 의미를 느끼게 하였을까. 어쩌면 혼자인 인생에 내가 개입 했다가, 내가 다시 사라져 버린다면 되풀이 되는 게 아니던가. 또 한 번 이기적인 일을 저질러 버렸단 생각에 연기를 후우- 뱉은 백현이 장초를 옆유리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던졌다. 당연히 담배는 바닥에 툭 떨어져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를 가지고 연기를 낸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 말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기분이 휴대폰 키패드를 두들기게 만들었다.

[학교 언제 끝나.]

몇분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울린다. 파일더미를 데스크 구석으로 몰아 놓던 백현이 진동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4시요. 왜요?]

입술이 마르는지 혀로 축이며 또 키패드를 만져 대었다.

[학원 가기 전에 영화 한 편 볼래?]
[아저씨랑요???]

이럴 때 아저씨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그래도 이 즈음이면 형이라고 불러 줄 때 된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나이 먹은 편도 아니고... 철 안 든 애 처럼 자기합리화 중인 백현을 경수는 알고나 있을까. 글자를 칠 때 마다 말로 뱉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썼다.

[어디 학교야. 데리러 가게.]
[본다고 안 했는데요.]
[약속이라도 있냐?]

백현이 인상을 쓰며 sns창을 노려 보았다. 이 녀석은 학교에서 대체 무얼 하는데 답장이 이렇게나 빠른 거야. 기분 좋게......

[이제 할 거에요 ㅋㅋ 백석고요.]
[알았어.]

"나이스."

허공에 주먹을 날리는 제스처를 취하는 동안 문을 열고 들어온 세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얼음이 되어 깡깡 얼어 버린 백현이 눈을 꿈뻑이자 더이상 웃음을 참지 못한 세훈이 자지러지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파일 하나를 품에 안은 채 데스크에 놓곤 실례 라는 말도 못 꺼내고 결국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나갔다. 살인적인 표정을 지은 백현이 허리를 굽히고 호출기의 버튼을 누른 채로 말 했다.

"왜 노크 안 해."
-했... 했었습니다.

하 나 진짜. 요즘 자꾸 잘 나가다 왜 이러지.



*



"오늘 출근 안 했어요?"
"아니 일찍 퇴근 했어."

매일 수트 차림만 보다가 편한 차림의 백현은 처음 본다. 아예 정문에 차를 세워두고 죽치고 있는 백현을 얼떨결에 친구들에게 사촌 형이라고 소개 해 버린 경수는 어째서 그렇게 급하게 대처 했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어제 개봉한 영화가 그렇게 재밌대."
"아저씨 친구 없어요? 왜 저랑 봐요."
"우리 친구 먹었잖아. 잊었나."

아, 그 날. 톡톡이는 차를 두드리는 소음에 정면 차창을 보자 빗방울이 설렁설렁 내리고 있었다.

"또 비가 오네. 며칠 잠잠 하더니."
"드디어 지구가 어떻게 되려나 보네요."
"별 소릴 다 해."

백현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 신호가 걸리자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짧고 긴 종이 세 장을 건넨다. 무심하게 건네 주었지만 웃고 있는 입꼬리는 가만히 있질 못 했다.

"난 쓸 일 없거든. 도서상품권인데, 참고서 살 때 라도 쓰라고."
"아 이제 새학기 라서 필요 했는데. 잘 쓸게요."

별 말 없이 경수가 받아 주자 백현이 더 활짝 웃어 보였다. 이내 신호가 바뀌면서 운전에 집중 했다. 알고 지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같이 있어도 편한 듯 백현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멜로디에 맞추어 콧노래를 흥얼 거리고, 경수는 편하게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 본다. 어떤 참고서가 가성비가 좋나, 미리 보는 중이었다.

백현의 차 안은 딱히 히터를 틀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원래 단열 기능이 좋은 건지, 여름엔 어떨지 궁금 했다. 휴대폰을 교복 바지 주머니 안으로 넣은 경수가 머릿속으로 할 일을 나열 했다. 매주 월, 목은 빨래를 하는 날이다.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학원 끝나고 집에 가서 빨래를 돌리고 나와서 반찬가게를 들렀다가 세탁소에 가서 맡겼던 외투를 가져 와야지. 그러고 나면 시간이 금방 간다. 샤워 까지 마치고 나서야 자정이 되면 잠에 든다.

무인발매기에서 영화표를 가져온 백현에게 경수가 말 했다.

"제가 음료수 살게요."
"팝콘도 먹고 싶은데."
"전 영화 볼 때 뭐 안 먹어요. 그럼 사 드시든가요."
"알았어 알았어."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걸치는 백현을 엉겁결에 받아 주고 있는 경수는 별 생각 없이 콜라 두잔을 주문 했다. 그렇게 영화 시간을 기다리다 상영관에 들어가 한창 광고가 나올 때 광고에 나오는 저거 먹고 싶다며 말 하려던 백현이 바로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경수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란다.

"경수야 어디 아파? 내가 괜히 불렀나."
"아니, 저..."

조명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귀 까지 불거져 있는 기분이니까. 경수가 제스쳐로 앉으라 하자 얼떨결에 앉게 된 백현이 경수의 땀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미안, 어떡하지. 나갈까?"
"아저씨."

상영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조명이 서서히 꺼져 간다. 얼핏 경수가 '죄송해요'라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러면서 사이에 놓여진 바를 올려 버리며 백현에게 바짝 붙는다. 이게 뭐 하는 거지. 동공 팝핀을 추며 당황해 하는 백현의 팔을 잡곤 팔짱을 껴 오는 경수의 교복 마이가 후드티에 부벼져 왔다. 그러곤 작게 귓가에 속삭인다.

"호러 라고 안 했잖아요... 저 무서운 거 못 봐요."

일순간 사람이 이렇게 까지도 귀여울 수가 있는 거구나... 싶었다. 좀처럼 집중 못 할 것 같던 영화에 둘 다 완전히 매료 되어 서로를 잡고 두시간 동안 놔 주지도 떨어지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이 타임에 사람이 그닥 없어서 그렇지, 만약 자리들이 꽉 차 있었다면 다 큰 남자 둘이서 부둥켜 안고 뭐 하는 건지 신경 써서 도통 영화에 집중을 못 했을 것이다.

들어갈 땐 멀쩡 했지만 종잇장이 되어서 나온 백현과 경수는 다신 호러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무언의 마음 다짐을 하였다.

"아 재밌네..."
"... 아니 예고편도 안 봤어요? 이 영화 때문에 심장마비도 왔었대요."
"난 그냥 너랑 영화만 보면 되니까..."

어? 말 없이 눈빛 교환만 오고 가는 와중이었다. 내가 무슨 소릴 해 버린 거지. 먼저 푸흐, 하고 웃어 준 경수가 와 있는 연락은 없는지 휴대폰을 한 번 보았다가 백현에게 말 했다.

"아저씨 같은 형 있음 재밌을 것 같아요. 많이 후졌지만 저희 집 가실래요?"

비장한 표정을 지은 백현이 버럭 했다.

"야이 씨, 후지긴 뭘 후져! 우리 집 보다 좋더라. 가자.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여서 학원 보내 줄게."

처음으로 환하게 웃은 경수가 엘레베이터 앞으로 앞장서는 백현을 쫓았다



*



"어 왔어?"

주방에서 현관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며 왔냐며 묻는 백현에 경수는 순간 울컥하며 몇년 만에 처음 말 하는 문장을 꺼냈다.

"... 다녀 왔어요."

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 말이 얼마나 하고 싶었던 건지도 알았다. 그 외에도 엄마, 아빠, 누나 라고도 말 하고 싶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가방을 내려 놓으며 말 했다.

"뭘 그렇게 사 오셨어요. 그리고 가신다며?"
"내가 언제. 나 자고 갈 건데."

뭐야... 얄미운 표정을 지어 보이곤 여러 야채와 과일을 냉장고에 정리해서 넣는 백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럴 필요 까진 없는데. 빈 냉장고 불쌍했나 보죠?"
"용케도 아네. 많이 산 것도 아니니까 미안해 하지 마라."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경수가 씽크대에서 두 손을 씻어낸 뒤 백현을 도와 정리 했다. 반절 이상은 정리를 마친 냉장고를 보고 있자니 이제 겨우 예전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때문에 나 한테 이렇게 친절을 베풀고, 친형 처럼 굴어 주시는 걸까. 설거지나 해야겠네. 이만 자리를 뜨며 안방에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온 경수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모습을 본 백현이 말 했다.

"경수야 나도."

흘끗 쳐다보곤 한개피 더 꺼내 불을 붙인 뒤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백현의 입에 손수 담배를 물려 주었다. 잇새로 연기를 분 경수가 백현을 지나 수돗물을 틀어 수세미를 적셨다. 저번 보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럼 근처 하수구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 오기 때문에 꼭 창문을 닫아 두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항상 그렇듯 습해진 집안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설거지를 했다. 늘 그랬다. 설거지 거리도 몇 없으니 설거지를 마치면 한대를 태우는 게 된다. 그치만 두배가 되어 버린 마당에 하나를 태우고 맨혀로 입안을 축이니 또 이것도 기분이 묘하다.

"밥만 먹지 말고, 과일도 먹고 그래."
"예."
"대답 참 오세훈 같다."
"누구요?"
"아니야."

정리를 마친 건지 기지개를 피며 으윽-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 왔다.

"와 운동 하냐? 등 봐라."
"주말에 가끔요."
"요즘 말로 오진다고 하던가."

바로 뒤로 와선 우와아악, 하며 등을 쓰다듬는 백현 때문에 경수가 몇번 꿈틀 거리자 킥킥 웃으며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혹시나... 삐진 게 아닐까 싶어서 슬쩍 뒤를 도니 여기가 저 사람네 집인가 싶었다. 내 베개를 배고는 누워서 리모컨을 들고 티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이따 안방에서 베개랑 이불을 더 꺼내 와야겠다. 아무래도 혼자 사니까 아주 가끔 씩 친구들이 편히 놀고 싶을 때 자고 가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구비해 놓았었다.

아 맞아. 빨래. 설거지를 후다닥 마치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빨래를 부어 넣은 뒤 세탁기를 돌린 경수가 거실로 나와 백현에게 말 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냉장고를 채워 넣어 놓은 백현 덕에 반찬가게는 들릴 필요 없겠고.

"어어."
"아주 살림 차리셨네요..."
"너네 집이 너무 편하고 좋아. 이런 게 바로 사람 사는 집이지."

트레이닝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놓곤 티비를 보는 저 남자가 잘 나가는 로펌의 오너가 과연 맞을까... 아닌 거 같은데. 하며 고개를 갸웃 거리며 경수가 집을 나섰다.



*



"... 무슨 야식 까지."

백현이 눈썹을 구브려뜨리며 말 했다.

"야식이 없으면 하루를 마친 게 아니야."
"살 안 찐 게 용하네요."
"타고 나기야 했지."

너희 집에 별 게 다 있더라. 집에 있던 재료로 골뱅이 소면을 만들었다며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한 입 먹곤 우물 거리며 대꾸 했다.

"전 생일 선물도 락스, 세제, 식재료 이런 걸로 받아요. 별 말 안 했는데도 그런 걸 주더라고요. 친구들 부모님도 그렇고."

아마 그 골뱅이도 그렇게 받았던 것 같은데. 라고 말 하자 백현이 크크 웃으며 얼굴을 잠깐 내밀었다가 허리를 폈다.

"할 줄 아는 게 안주류 밖에 없어서 미안하네."
"해 주는 게 감사하죠."
"경수 밖에 없어~"

친구가 와도 메워지지 않았던 적막함이 완전히 가신 느낌이었다.

"쟤 김종인이래."
"아 그걸 왜 말 해요!!!"

복면을 쓰고 나와 노래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이미 한발 앞선 내용을 말 해 버리는 백현 때문에 경수가 이글 거리는 눈망울을 보였다. 마침 그릇이 비워지고 세탁기가 다 돌아 갔다는 신호를 알리는 음악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상을 들으려는 경수를 백현이 제지 했다.

"이건 내가 치울게. 할 일 해."
"아... 네."

결국 화장실로 다시 돌아온 경수가 팔에 빨랫더미를 쌓으면서 생각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마음이 미어져 오기만 했다. 채워지지 않던 외로움이 넘실 거리는 듯한 기분에 그만 또 울컥해 버린 것이었다. 내일도, 모레도, 다음주도. 또... 이럴 수는 없을까. 난생 이런 욕심은 처음이었다. 아무 일 없던 척 나와 빨랫대 앞에 빨래를 내려 놓고 하나 둘 털어서 널기 시작 했다. 종종 아빠가 저런 자세로 누워서 티비를 보곤 했는데. 아빠 모습이 보이는 게 백현도 어쩔 수 없는 연륜이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볼 위로 무언가가 흘러 내리길래 아차 하며 손등으로 닦아 내었다. 하지만 언제나 비 처럼 더 세차게 내려질 뿐이었다. 혹시나 백현이 볼까 봐 빨랫대에 기대어 눈물을 닦고 있자니, 두 팔이 쑤욱 들어 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등 위로 온기가 닿아 왔다.

왜 안냐는 말도, 왜 우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위로 해 주는 게 차라리 나았다. 결국 울음소리가 터지면서 더 벅차 오른 경수가 아예 몸을 돌려 백현의 목을 끌어 안았다. 더욱 꽉 안아 오는 팔 힘에 그저 이끌리듯 안겨 있던 것 같았다. 그 동안의 서러움이 터져 나오면서 너무나 외로웠다는 걸 말해 준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다정해요."
"......"
"왜, 왜 울게, 만드냐고..."

경수의 허한 목덜미에 백현이 코를 묻어 왔다. 그것이 대답을 대변하는 듯 했지만 의미는 모르겠다. 하지만 곧이어 백현 마저도 움찔 거리는 게 그도 울음이 터진 듯 했다. 소리는 전혀 내고 있지 않지만 목덜미로 부터 느껴지는 물기에 그냥 눈 감아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곧 저 보다 서럽게 흐느끼며 아픔에 박차를 가하는 백현에 살짝 놀랐다. 아예 옷을 움켜 쥐는데 그 주먹이 떨려서 양심상 백현이 그랬던 것 처럼 꽉 안아 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람에게도 아픈 일이 있던 걸까. 만약 내가 일기를 쓴다면 이렇게 써 내려 갔을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슬프게 우는 건 처음 봤어요.



*



달 뜬 그 밤에 서로 울고 불며 하다가 쓰러지다 싶이 잠에 들고, 문제는 일어나고 난 후 였다. 후폭풍이 너무 심했다.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고... 경수도 부끄럽고 백현도 부끄럽고, 분명 둘 다 머릿속엔 어제의 수치 플레이가 무한 재생 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제 미리 차에서 꺼내온 수트를 갈아 입는 백현과 안방에서 교복을 갈아 입는 경수. 헌데 또 다른 문제는 어제 야식을 먹으면서 백현이 경수의 학교를 바래다 줄 것을 먼저 떠벌렸단 것이다. 우물쭈물 방에서 나와 가방을 매고 나오는 경수에게 말 했다. 오늘 맞이하고 처음 눈 마주친다.

"갈까?"
"가죠."
"... 뭐 이렇게 된 김에."

그대로 자켓 앞단추를 여미며 성큼성큼 다가온 백현이 고개를 살짝 틀어 살며시 경수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얹혀 놓았다. 꾸욱 진하게 도장을 찍은 백현이 물러서며 씨익 웃어 보였다. 그저 하고 싶어서 했을 뿐이었다. 이끌리듯이.

"천천히 나와. 차 가져 올게."

집 문이 닫히자 마자 경수가 펑! 하고 터진 듯 새빨개진 얼굴로 식탁 위에 놓인 담배갑을 열었다. 손이 후덜 거렸다. 담배를 꺼내다 말고 식탁에 두 팔을 짚은 경수가 좀처럼 식지 않는 몸의 열기에 오늘 정상인 모습으로 등교는 가능할지에 대해 생각 했다.



*



학교가 끝나자 마자 지하철에 올라 탔다. 서점에 가기 위함이었다. 대형 서점이 아닌 이상 참고서의 재고들이 포괄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어서 도서상품권을 썼다는 것을 아저씨 한테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내 마음을 단 한 단어로 확정 지을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하철 안에서 앉아 있는 내내 심장을 졸였다. 키스... 까지 한 마당에 아저씨가 날 좋아한다는 게 다 들통나지 않았나. 하지만 난... 음. 아저씨 생각만 하면 볼이 발그레 해지는 것은 아침과 같지만 단번에 정리 하는 게 그렇게 어렵다.

복잡한 사람들 틈으로 빠져 나와 서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외투를 입어서일까 비의 눅눅함을 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에 잇따라 오늘도 소나기가 내렸다. 뉴스에선 오늘 부로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 마저도 믿을 만한 것인지, 참. 서점 안으로 들어서며 수학 참고서를 찾는데 오늘 따라 유난히 즐거웠다. 전에 조사 했던 대로 차례 대로 꺼내어 종이를 팔락이며 구성을 살펴 보았다. 어느 것이 도움이 될 지, 내 수준에 맞을 지.

한참 집중해야 하는데 또 아침 때 있던 소동이 생각나 평정심을 잃고야 말았다. 근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주머니가 우우웅- 하고 운다. 친구인가, 싶어서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와 있다. 별 생각 없이 꺼낸 문자였지만 세상을 내려 앉게 할 줄은 몰랐다.

[변백현 법률 사무소의 변백현 변호사 님 비서 오세훈 입니다. 가족 분들과 친지 분 께 말씀 드립니다. 오늘 오전 출근길에 사고를 당하시고 상태가 다소 위독하셔서 재빨리 응급실로 옮겼지만, 고비를 넘기시지 못 하고 15분 전 사거 하셔서 변백현 변호사 님은 하늘로 영서를 떠나셨습니다. 일일이 전화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병동이나 그 외 문제는 메세지나 다이렉트로 전화 주시면 빠르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한 단어만 뚜렷하게 보이는 듯 했다.

'사거'

누가 죽었다고...... 참고서를 그대로 든 채 휴대폰 액정만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아직 구매하지도 않은 책의 종이 위로 눈물이 떨어져 잉크가 얼룩져만 갔다. 누가, 누가. 대체 갑자기 왜... 지나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경수를 흘겨 보고 지나갔다. 하지만 경수는 마다 하지 않고 그 자리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허면 오늘 아침의 그 입술은 라스트 카니발이었던 게 되는 걸까. 왜, 나의 아픔을 달래 주곤 떠나 버리는 건가. 내 모든 걸 이해 했다는 듯이 그랬으면서. 나를 왜 시험에 들게 만들었는가. '비서 오세훈' 어제 들어본 듯 했던 것 같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단 것은 여러 군데에서 묻어 나왔다. 다시 또 손이 파르르 떨려 오자 습관 처럼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찾았다.

애써 진정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경수가 지갑을 꺼내며 계산대로 가 참고서를 내밀며 상품권으로 계산을 마쳤다. 우산도 챙기지 않고 서점을 빠르게 나서면서도 이 생각이 들었다. 상품권으로 내지 말 걸 그랬나. 가지고 있을 걸 그랬나. 이렇게 쓰라고 받은 선물이었지만 아저씨 라는 이름만으로도 목이 매어 왔다.

겨우 반나절 만에 이렇게 또 상처를 떠안은 채 울어야만 했다. 난 행복할 가치가 없게 태어나 버린 걸까. 가족이 세상을 떴을 때 더 구슬프게 울지 못해 벌을 받는 걸까. 문자가 왔던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오세훈 입니다.

... 나, 뭐 하려고 전화 했지.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도경수 씨? 말씀 하세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슬픔이라는 잔인한 나의 두려움이 두 번이나 코 앞으로 닥쳐 와서일까 할 수 있는 게 없단 걸 또 다시 뼈 저리게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그에 걸맞게 우중충한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소나기에 홀딱 젖어 가는 중이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말씀 하십시오.

더는 대답이 없자, '다시 연락 주세요' 라는 음성과 함께 전화는 끊겼다. 난 우는 것 밖에 하지 못 한다. 이렇게 지독한 혼자란 굴레 안에 갇혀 평생을 쳇바퀴질 해야 하는 인생인 건가.

좋아 한다는 말도 못 들었다.
좋아 한다는 말도 못 했다.

첫만남 때 혼자서 우릴 친구로 만들어 버린 것 처럼 그는 끝맺음 까지도 이기적이다. 감정을 좀처럼 추스려내지 못 하고 더러운 젖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 버렸다.

'경수야'

누가 죽었다고.

'경수야 나도'

사정없이 내리꽂히는 이 비 아래 아예 엎드린 채로 젖어 버린 참고서를 안고 오열하는 경수를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시험 기간을 핑계로 가족 여행을 빠지고, 온 가족이 사망 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아파트 엘레베이터에서 바를 붙잡고 한참 울분을 토하다 겨우 이웃의 부축을 받아 택시에 올라 탔었다. 이번에도 담배가 소용이 있을까. 라스트 카니발. 아저씨는 정말 내 마지막 축제 같은 존재 였을까. 펑펑 터지는 일순간의 빛인 폭죽 처럼 잠깐 터지고 말아 버릴 사람이고, 사랑이었나 보다.






-
Sia의 Cheap Thrills를 들으며 작업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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