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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도사원은 직진 중

기도 冀圖 2017. 2. 18. 22:09
"팀장 님이신가요?"
"아, 예... 그런데 누구..."

백현이 어물쩡이게 앉으며 초면 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근엄한 표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는 남자를 흘겨 보았다. 아우라만 보면 임원감인데... 사회 경력으로 쌓은 스펙 레이저로 남자를 아무리 스캔하여도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 다니는 것은 '높은 사람'이었다. 굳이 위에서 호출할 정도면 굉장히 굉장한 분이 아니실까. 바로 눈이 마주치자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백현과 달리 눈썹 한쪽도 꿈틀 안 하는 남자 때문에 입꼬리에 경련이 오려고 했다. 아, 맞다. 자켓 안 주머니에서 손을 두어번 뒤적인 뒤 명함을 꺼낸 백현이 다시 일어나 정중하게 명함을 건내며 악수를 요구 했다. 무미건조한 눈매로 건네는 것을 받아든 남자는 무표정으로 손을 마주 잡았다.

"영업부 팀장 변백현 입니다."

손에 땀이 차려고 해서 백현이 먼저 손을 슬며시 놓았다. 앉아서 악수를 받네... 새로운 거래처인가. 그렇다기엔 첫대면에 매너가 없어 보이지 않는가.

"업무 환경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 아, 예. 보시다 시피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최대한 단란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퇴근은 언제 하세요?"
"6시 정시 퇴근 합니다."
"야근은요."
"잦은 일은 아니다만, 만일 해야 한다면 근로기준법에 의한 야근수당을 지급하고, 받고 있습니다."

꼬박꼬박 대꾸하는 제 모습이 우스워 보일 정도였다. 정체도 밝히지 아니하고 왜 자꾸 묻는 걸까. 백현이 가만히 있질 못 하겠어서인지 구두코가 자꾸만 꿈틀 거렸다. 황금 같은 이 점심시간에 잡아 두고... 회의실 밖으로 비어 있는 사무실이 애석하기만 하였다.

"어깨선이 예쁘시네요."

아? 데스크만 바라 보다 그 말에 백현이 고개를 들자 두 볼이 발그레 해진 근엄한 남자가 코 평수를 넓히고 있었다. 순간 푸헹 하고 웃을 뻔 했다. 아니... 웃고 싶으면 웃던가, 이상한 모습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대신 빵 터트리고 싶어서 안타까운 복통이 일었다.

"전 도경수 입니다."
"... 하하 네... 도경수 씨."
"저랑 사귈래요?"
"뭐요?"
"아님 결혼, 아 미안 합니다."
"......"
"역시 사귀는 게, 아 아닙니다."
"......"
"빨리 골라, 아이고 죄송합니다."

혼자 계속 뭐라는 거야. 무서운 사람인 듯 싶었지만, 무단침입한 또라이 새낀 거 아니야?! 백현이 휴대폰을 손에 꼬옥 쥐고 의자를 뒤로 살살 빼며 말 했다.

"당신, 누구요?"

이제와서야 경수가 해맑게 웃어 보인다.

"오늘 입사 했는데요."

뭐?!

"근데 전 왜 불러요?!"
"상사한테 보이는 첫인상이 중요하대서요."
"누가요?!"
"인터넷이요. 사무실이 탁 트여서 좋네요. 먼지 쌓일 일 없고."

회의실 바깥으로 보이는 사무실의 전면 유리창을 보며 경수가 말 했다. 애초에 긴장한 건 백현 뿐이었던 것 같단 생각에 백현은 주먹을 부들 거렸다. 온갖 각은 다 잡더니 푸르른 새싹이었단 말이지... 이 녀석이... 영업부니까 자신을 찾았을 테지만, 마지막 동아줄이다 치고 물었다.

"혹시 영업부는 아니시죠?"
"맞습니다."

^^ 처럼 웃어 보이는 경수에 백현은 또 다시 자존심이 파사삭 구겨졌다. 속으로 진상 등장이라며 경보를 울리는 골을 부여잡았다. 뒤늦게 느껴지는 허기짐에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백도 도사원은 직진 중
/기도 씀






대체 그런 건 어딜 들어가야 알 수 있는 걸까. 어떤, 어떤! 몰상식한 인간이... 상사 앞에서 주름 잡으라고 누가 알려 주었단 말인가. 백현은 요새 며칠 도경수 라는 새내기의 등장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이었다. 심장이 쿠크다스 라는 말이 이럴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아악!!! 백현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작스레 데스크에 머리를 박자 화들짝한 사람 몇명이 백현을 흘겨 보았다. 저 자식 이제 팀장을 물로 알 거야. 사귀자고 조롱 하였던 게 떠올랐다 하면 백현에게 껌딱지 처럼 들러 붙어 종일을 괴롭혔다.

"팀장 님 오늘도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아뇨. 왜요."

기연이 오늘 안으로 수정을 맡았던 기획안을 조심히 내려 놓으며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내밀었다.

"다들 걱정하세요. 안 그러시던 분이 매일 풀 죽어 계시니까."
"그런 적 없어요. 커피 고마워요."

그런 적 없긴, 개뿔... 속으로 퍽유를 든 기연이 제자리로 돌아 갔다. 한껏 예민해진 백현은 그 날 이후 일은 손에도 안 잡힌다며 다 떠밀었고 그것은 곧 원망은 눈초리가 되었다. '안 그러시던 분이' 이 말의 뜻을 백현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멀쩡하기도 잠시 도경수 생각이 나면 모니터엔 알 수 없는 글자가 떠 다니고 종이 위엔 해괴한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정식으로 사과 받기 전 까지는 절대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내가...! 내가 이 자리에 내 발로 오르기 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팀장 님."
"......"
"팀장 님."
"......"
"팀장 님."

백현이 서류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대꾸 없으면 제발 가 주실래요."
"아니... 회비 내러 왔는데요."
"아......"

다다음주 주말에 신년을 맞이해 팀원들 끼리 펜션을 잡아 겨울 바닷가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그사이 누군가에게 들은 모양인지 회비 봉투를 내미는 도경수의 눈은 마주치지도 않은 채 백현은 봉투를 휙 잡아채어 서랍에 넣었다. 얼마나 또 내 심장을 몰아치게 하려고... 이제 용무는 끝난 것 같은데 경수는 여전히 멀뚱히 서 있었다.

"가 보세요."
"저 이제 할 일 없는데요."

그리고 백현의 미움을 더 사는 이유는, 일을 끝내주게 잘 한다. 너무 미워서 죽도록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로 업무에 타고난 체질인 것 같아 보였다.

"... 하아. 동료들 커피 라도 타다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자 방긋 웃으며 뛰어간다. 그 모습이 마치 펭귄이 뒤뚱이는 것 같아서 백현이 풋 웃었다. 아싸, 나 비웃은 거 맞지? 이로써 1점 획득이다. 이겼다는 승리감에 만취해 백현도 잇따라 방긋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 였다.



*



혜성 그룹엔 3대 팀장이 있는데 바로, 영업부의 변백현과 무역부의 박찬열, 마케팅부의 김민석. 이 셋만 모이면 자석 처럼 주위에서 사람들이 달라 붙어 콘서트가 되어 버린다는데 요즘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백현 때문에 그 화력이 줄어 들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바로 그 전설인데, 흐흑... 죽어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야 너 내일 출근 안 해?"
"까고 있네. 회사 얘길 왜 해!"

오늘 따라 유달리 기분이 좋아 아예 퍼 붓다 싶이 술을 마시는 백현을 슬슬 찬열을 제외한 친구들이 걱정하기 시작 했다. 이러다 일찍 녹 다운이 돼 버리면 이 진상을 누가 데려다 준단 말인가. 너? 아니. 너? 아니. 나? 아니...

백현 같은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바로 취업 했기 때문에 다른 애들 보단 사회 생활이 빨랐다. 덕분에 대학 진학도, 군 입대도 여유로웠지만 백현은 항상 직장 내에서의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언제 묻히고 도태될 지 모른다는 관념 때문에 더 높이 솟아 지난 날의 자신을 짓밟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딱히 자랑할 사람도 없으면서 자신의 성공한 권위를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자존심이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끝을 보자!

"대답 해. 혜성의 별이 누구야?"
"아... 그야 너지."
"근데... 그런데... 우주 쓰레기 하나가 내 몸에 확 박혔다? 너무 아픈 거야. 근데 내가 오늘 걔를 비웃었어. 쩔지."

그 말을 끝으로 백현은 또 잔을 쭈욱 비워내었다. 웬만하면 굽힐 줄 모르는 이 불쌍한 중생을 괴롭게 만들었다면 또 얼마나 진상일지 가늠이 안 되는 바람에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현이 갑갑했는지 넥타이를 당겼다.

"위에서 불렀다며. 그럼 낙하산 아니냐 설마?"

취해서 뜨는 둥 마는 둥 했던 백현의 두 눈이 희번뜩 뜨였다.

"야 박찬열아."
"어..."
"걔 그 때 처음 만났을 때 입은 정장. 그거 사려고 지금 석달을 벼르고 있거든?"


찬열이 관심도 없다는 듯 다른 테이블들을 훑어 보며 딸기 하나를 입 안으로 쏘옥 넣었다.

"이야 맞나 보네."
"아 뭐가 이렇게 번잡스럽지."
"잘 해 봐. 정말 낙하산이면 이득이 있지 않겠니."

팀장직을 오래하긴 했지. 하지만 심증만 가지고 굴려 먹는 것을 마음 먹기엔 아직도 백현은 자존심의 스크래치가 사라지지 않았다. 여러 컬러의 많은 유화 물감을 어지럽게 섞어 놓은 듯한 감정이었다. 지금도 수입이 형편에 부족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 뒤따르는 욕심을 채워지지 않았다.

"네 심보를 보면, 뭐든 할 놈이야."

백현이 말 없이 채워진 잔을 들었다. 어딘가 모르게 고심에 빠진 듯 했다. 백현을 포함해 넷이 전부 였던 술자리는 어느새 둘로 반절이 줄어들어져 있었다. 백현의 포커스가 찬열에게 맞추어졌을 때 구렁이 처럼 빠져 나갔을 테지만 백현은 딱히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우선 찔러 봐."
"뭘."
"진짜 너 좋아하는지."
"야 조롱한 거라니까."
"이 씨팔 새끼야 알아서 해."

어쩌면 내 인생에 또 다른 동을 트게 해 줄 열쇠... 백현의 눈동자는 멈춰 있지만 머리는 재빠르게 돌아 가고 있었다. 진짜라면? 정말이라면? 그깟 자존심 때문에 과정이 느리긴 하겠지만 떠 보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법자이니까!!!!!! 혜성 그룹을 손에 쥘 수 있게만 된다면 별 볼 일 없던 집안을 일으킴과 동시에 영웅이 되는 것이다.

"누나 번호 좀요."

물려 주고 물려 받는 이 상류층들의 재수 없는 흐름을 이 변백현이가 끊어 버리는 거야. 백현은 술을 홀짝 홀짝 마시며 우주 정복 까지 앞서 나가고 있을 때 같이 취한 찬열은 누구 친구 아니랄까 봐 쫙 빠진 수트를 입고도 철 없는 짓만 하고 있었다.

"싫어요? 알았어요. 형 번호 좀요."

도경수 이 자식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줄이야.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안 취한다."

새벽으로 넘어 가고 나서야 호프집을 나선 둘은 몸에 열이 올라 더운 모양인지 자켓을 어깨에 걸친 채 였다. 새벽의 열기는 그 여느 때 보다 뜨거웠다. 설사 계절이 겨울이라 해도 소용 없었다. 사람의 거리, 만남의 거리... 북적이는 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백현도 지금 만큼은 하늘을 날아 다닐 것만 같았다.

"근데 바닥이 자꾸 날 때리네."
"어, 나돈데."

둘만 망각했다. 술에 진탕 취했다는 것과, 또 연달아 넘어지면서 바닥에 엎어져 쌍코피 주르르륵 흘리는 모습도.



*



난 입사 2주차 일개 사원 도경수다. 난 오늘도 감시한다. 누구를? 바로, 팀장 님을. 파일철로 코와 입을 가리고 데스크 담 너머로 백현을 쳐다 보고 있던 경수가 미간을 찡그렸다. 어제와 넥타이가 같다. 게다가 구겨진 셔츠와 자꾸만 두통이 이는 듯 눈살을 찡그린다.

"경수 씨 뭐 해요?"

엉덩이를 뺀 채 ㄱ자로 지켜 보고 있었는데 마침 뒤를 지나가던 동료가 말을 걸어 왔다. 경수가 미간을 찡그린 채로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대답 해 주었다. 경수 딴에서는 최대한 성심성의껏 응한 것이었다.

"스트레칭 중 입니다."
"아직 젊네. 시간 좀 지나면 그것도 귀찮아진다니까."
"하하."

그렇게 동료가 무사히 지나가고 도로 백현에게 초첨을 돌리자 백현이 셔츠 소매를 걷어내고 있었다.

"헉."

항가항가. 순간적으로 경수가 코피가 나는 줄 알고 인중을 훔쳤지만 다행히 그 무엇도 묻어나지 않았다. 사실 입사 첫날 부터 백현을 불러낸 것은 별 이유 없다. 워낙 금사빠 라서. 첫인사를 무조건 백현에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속마음을 숨겨내지 못하는 화법 때문일까 다 말해 버려선 백현이 부담스러워 하면 어쩌나 하는 심정이다. 이 주책 바가지... 또 다시 모니터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일에 집중하는 인자로운 모습에 기관차 처럼 경수의 콧구멍에서 뜨거운 숨이 풍풍 나왔다. 다가설 기회만 온다면 금이든 옥이든 다 갖다 바칠 수 있었다.

오늘도 미모 어마무시한 걸. 아이돌을 동경하는 한 팬 처럼 경수가 백현의 모든 모습을 수집하려고 들었다. 첫날 이후로 오랜 접촉이 없던 게 아쉽지만 이번주 주말만 온다면 팀장 님을 꼭...!

꼭... 쓰러트리겠다...!!!

"여깁니다 대표 님."



*



"여깁니다 대표 님."

예고 없는 대표 님의 방문에 현 사무실 내에서 책임자인 백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뛰쳐 나왔다. 이렇게 거대하신 분이 왜 갑자기...

"영업부 팀장 변백현 입니다. 대표 님."

행여나 순간적으로 '도경수 때문에?', '도경수 아버지?' 라는 생각이 불시에 지나가서 직감적으로 경수의 자리 쪽으로 고개를 냉큼 돌렸지만 지평선 끝에 살며시 걸쳐진 태양 처럼 머리 꼭지만 살짝 보이고 있었다. 다들 기립한 와중에 혼자 저러고 있는 거면 어쩐지 예감이 빗나간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내기이니 대표 님의 낯을 모를 수도 있을 테니까. 역시 그냥 또라이인 걸까?

대표 님은 사무실을 이리저리 둘러 보셨다. 그러더니 불이 들어오지 않는 형광등을 보곤 비서에게 무어라 속삭이셨다. 대강 바로 교체 하라는 말 같았다. 직접 행차 하셔서 살펴도 보시고 회사 굴러 가는 꼴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구나. 잠깐이겠지만 우리 부서에 들러 주신 것만으로도 백현은 영광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 하겠다며 악수를 청하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 자리엔 더이상 대표 님이 계시지 않았다.

엥?

백현이 넋 나간 체를 하자 어디선가 빡! 하고 머리통을 타격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너 왜 아는 척을 안 해?"
"하지 말랄 땐 언제고. 왜 때려..."

백현이 손을 거두면서 환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는 역시 였다. 모른 체 다 해 보았자 도경수는 넌 내 손아귀 안이야. 그리고 넌 이제... 나의 것인 셈이다... 이렇게 보아 하니 대표 님도 영락 없는 아버지이셔 보였다. 도경수도 철 없는 아들램이고. 부자지간이 한 회사 안에... 어떤 기분일까. 우렁차게 경수에게 몰아부칠 땐 언제고 다시 살가운 모습으로 돌아온 대표 님이 말씀 하셨다.

"못난 막둥이 좀 잘 부탁 드립니다. 워낙 멍청이 라서."
"아닙니다. 일 처리도 수월하고 제법 하던데요."
"평생 살고도 못 볼 일이네."

신년 덕담인지 뭔지 자꾸 뭘 말씀 하시는데 귀에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백현의 시선은 오롯이, 도경수에게만 가시 처럼 꽂혀서 빠질 줄을 몰랐다. 빤히 쳐다 보는 것 때문에 경수가 부끄러움에 몸을 배배 꼬아 대는 것만 빼면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자존심? 뭐 어때, 버려~!!! 어우 대표 님 저 이 회사 너무 마음에 드는 걸요?

백현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내리자 도경수는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걸 참지 못 했다. 오히려 대표 님이 있는 게 더 불편한지 안달이 난 것 같아 보였다. 더 유용하게 써 먹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아닌 '확신'이었다. 도경수의 감정에 대한 정확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 반해 경수는 부담 때문에 자신을 더 싫어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에 앞에 나서길 주저 했지만 관대한 반응을 보이는 백현 때문에 앞으로 더욱 더 편안히 들이대고 들이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얘, 얘 원래 이런 애 였나...?

"저기 그만..."
"팀장 님 핵존잘인 거 아세요?"
"핵... 뭐요?"

10분에 한 번 씩 커피를 들고 나타나는 도경수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이 놈.

"커피는 이제 됐,"
"쉬쉬쉬쉿."

음? 여태 지켜본 결과 도경수는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 정도로 질척일 거란 예상은 하지 못 했다. 빈 곳도 없는 나를 채우려 하는 것 처럼 예언 조차 할 수 없는 언행은 상상 밖이었다. 무언가 혼낼 거리가 필요 했다. 그렇지, 오늘 아침!

"오늘 아침엔 왜 지각한 거에요? 이미지상 항상 용모가 단정해야 하는데 오늘은 좀 실망이었습니다."
"죄송해요... 늦잠 자서 헬기 대기 하느라..."
"......"

맞아 얘 대표 아들이었지... 백현이 크흠 하며 입술을 꾹 물었다. 더 없나. 조온나게 허버얼나게 뚜까 혼내고 싶은데.

"아... 너무 귀엽, 아니 뭘 어떡하지. 아니, 정말 아..."

경수가 백현을 강아지 보듯 다정하게 주시하자 백현이 주춤하며 말 했다.

"왜 이래요......"

이러다간 얼마 못가 무너지게 생겼다. 또 밀리는 듯한 패배감이 느껴지자 백현이 어금니를 물었다. 뭐 라도 해야해. 도경수를 이겨 내야 해. 자꾸만 물러서면 어느새 이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될 것만 같단 기분이 들어서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경수의 손목을 탁 잡았다. 순정만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어맛'이란 수식어가 어울릴 표정을 지은 도경수에게 말 했다.

"퇴근 하고 얘기 좀 해요."
"좋아. 오늘 쓰러트리자."
"뭐라구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오늘 쓰러트린다니요."
"헐. 속으로 한다는 말이 그만 주둥이 밖으로..."
"... 됐습니다. 돌아가 보세요."

왠지 모르게 자신이 걱정되는 오늘의 백현이었다.



*



달갑지 못한 귓청을 찌르는 소리가 뻐렁치며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경수는 조용한 데서 얘기 하자며 먼저 자기 집으로 백현을 초대 했다. 백현은 차량을 회사 주차장에 냅두기로 한 뒤 경수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무슨 운전을 이렇게 난폭하게 하는지 정말 생명이 위태로웠다.

"... 운전은 누구한테 배웠어요?"
"운전을 운전 강사한테 배우죠."
"아, 예..."

말을 맙시다 이 양반아. 주차 까지 끝나자 백현이 꽉 잡고 있던 안전벨트를 놓고 차체에서 내렸다. 엄마야, 다리 후들 거린다. 그렇게 차에서 내리고 나서 부터는 아무렇지 않게 집 까지 올라온 백현은 속으로 계속 해서 감탄사를 뱉었다. 정말 이 아파트 엄청 호화스럽다. 마음속으로 자동으로 가격을 매기던 백현이 침대인지 소파인지 굉장히 중의적인 가구 위에 가방을 내려 놓자 경수도 따라 내려 놓고는 바로 이어진 주방으로 향했다.

"같이 저녁 먹어요."

여기 까지 온 이상 제대로 한 번 떠 보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 하는 척 우물쭈물하는 모습으로 경수와 눈을 마주한 뒤 말 했다.

"지금 얘기 할게요. 그 때 경수 씨가 말씀하신 거 있잖아요."
"네에. 어떤 거요?"

후라이팬 여러개를 나열해 놓고 고르는 모습을 보곤 어이가 없었다. 다 똑같이 생겼잖아... 정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섯개의 후라이팬이 모두 같은 디자인의 제품이었다.

"사귀자고 했던 거... 그건 좀 생각해 봐야,"
"닥쳐."
"뭐?"
"닭 요리 좋아 하세요?"

깡소주를 넘긴 듯이 알딸딸한 기분이 올라 왔다. 도경수는 아무렇지 않게 고른 후라이팬을 까딱이며 고개를 같이 흔들었다. 좋아 하세요, 안 좋아 하세요? 멍한 얼굴로 몇번 주억여 주니 그새 요리 모드에 돌입한다. 와... 돌직구 먹었다. 닥치라니. 상사에게 닥치라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닥치 라고 한 거냐. 상당히 악덕이구나 생각하며 백현이 소파 위로 털썩 나앉았다. 들어서면서 '편히 계세요, 팀장 님.' 이라 했던 도경수는 설마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혼자 사는 겁니까?"
"아뇨, 사람 하나 더 달고 살아요."
"... 근데 이렇게 손님 데려 와도 괜찮아요?"
"어차피 잘 들어 오지도 않는데요."
"아."
"저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이 때다 싶어 백현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 했다.

"아마도요. 살짝 질투도 나고."

일순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아 백현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우주 정복은 곧 나의...

쿠당탕탕 하는 소리에 백현이 벌떡 일어 서자 보이는 것은 바닥에 떨궈진 후라이팬과 양손에 맨 닭을 들고 셔츠가 밀가루 범벅이 되어 있는 도경수 였다. 여차 하면 이 집이 폭발할 지도 모른다는 직감적인 느낌이었을까 결국 소매를 걷은 백현이 경수를 대신해 후라이팬을 주워 올렸다.

"제가 할게요."
"손님이신데 어떻게 그래요."
"손님이니까 해 드리고 싶은 거에요."
"그래도..."
"옷도 좀 갈아 입으시고요."

너 웃는 꼴 다 보이거든... 백현이 놀러 와서도 쉬지 못 하는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며 벌써 부터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 했다. 아까 부터 느꼈지만 집안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장난 아니었다. 이틀만 지내도 감기에 걸릴 것만 같았다. 이 집에 멀쩡하게 살긴 하는지 도경수는 항상 건강하다 못해 힘이 넘쳐 흐르는 것 같던데. 여러 생각을 돌리고 돌리며 하다 보니 요리는 완성 되었다. 그닥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라 간단한 치킨 요리를 만들었다. 밀가루는 정리 하여 두고 오븐에 구었기에 튀김옷이 없어 먹기에 불편함은 덜 수 있을 것이다. 경수를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엎드려서는 꺼이꺼이 울고 있는 게 보였다. 순간 당황해서 왜 우냐고 묻자 경수가 눈물 콧물 다 질질 흘리며 말 했다.

"너무, 너무 냄새가 맛있어서... 팀장 님이, 최고에요..."
"아... 그렇구나. 어서 오세요."

살다 살다 이런 황당한 이유는 처음 들어 본다. 도경수 앞에선 더더욱 냉정해져야겠다고 생각 했다. 조금만이라도 정신줄을 놓아 버리면 같은 길을 걷게 될 것만 같아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경수를 따라 식탁에 앉았다. 사람 둘 사는 집에 의자가 너무 많은 게 아닐까.

"따흑."
"아니 왜 또 울어요?"
"고기가 부드러워요."
"비싼 음식만하겠어요."

입에 금만 물고 살았을 경수를 자세히 보아 하니 내면이 참으로 순수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정성 하나에 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요즘은 패스트푸드 자주 먹어요. 먹기도 간단하고 빨리 나오잖아요. 덕분에 식당 가면 좀만 걸려도 실증이 나요."
"아... 제대로 된 식사에도 빨리 나오는 건 있잖아요."
"어떤 거요?"
"국밥이나 백반? 아, 빕스도 빠르던데."
"팀장 님 요리 잘 하시는데요? 누나도 좋아할 것 같아요."
"누나?"
"아, 같이 산다던 사람이 누나예요. 입이 되게 까다롭거든요."

그렇구나. 제법 평범한 대화가 오고 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집으로 귀가는 어떻게 할까 생각 중이었다. 지하철은 밀릴 테고, 역시 버스 타는 게 나을까. 내일이 여행이었던 게 가까스로 기억 나 도로 회사로 가서 차를 끌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였다.

"단 거 좋아 하세요?"

내가 단 것을 좋아 하던가. 머뭇 거리던 백현이 생각 끄트막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경수 때문에 약간이나마 이용해 먹으려던 야망이 녹아 내렸다. 내가 또 왜 이러나 모르겠다. 치킨의 향에, 낯선 집 냄새에. 백현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이렇게나 잘해 주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드디어 내일이네요, 여행."
"그렇죠."
"음 14일이면... 발렌타인데이네요."
"아."

피곤할 때 마다 달달한 사탕을 까 먹는 백현이 수트 바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포도맛 사탕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 경수에게로 밀었다.

"마침 생각 나서. 먹어요, 선물 입니다."

이런 기념일 챙겨 본지가 언제일까. 젊을 적에도 안 챙겨 본 것을 이제와서 라도 달래어 본다. 이런 이런... 반했으면 어쩌지. 피식피식 웃으며 포크로 닭고기를 집어 입 안으로 밀어 넣던 백현이 고개를 들고 경수를 보자 마자 의자를 확 밀치고 일어섰다. 의자가 쿠당, 하고 뒤로 넘어졌다. 경수가 사탕을 꼬옥 쥔 채 백현의 존잘력에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선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피... 피! 경수 씨 피 나요!"

아... 경수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냅킨으로 인중을 훑었다. 더이상 흘러 내리지 않는 게 잠깐 나 버리고 만 것 같았다. 경수에게 신경 쓰느라 안절부절 못 하는 백현이 한 쪽 볼에 씹던 잔여물을 모아 놓아 볼록해진 볼로 우물 거리며 말 하는 걸 보자 마자 또 피가 거침 없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아, 미치겠네."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치니 도경수도 꽤 잘 생긴 편이었다. 짙은 눈썹에 전체적으로 진한 이목구비가 이제 와서 눈에 틔었다. 백현이 손수 냅킨으로 계속 닦아 주느라 미간을 좁혔다. 경수는 알고 있다. 그가 집중할 때 나오는 습관이란 것을.

"무슨 애 입니까? 이거 하나 제대로 못 닦고."

자기는 이렇게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닦아 주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가만히 앉아서 곧이 곧대로 받아 주고 있는 꼴이라니. 왜 굳이 대표 님 께서 직접 내려 오셨는지 알 법도 한 것 같았다. 혹시 내가 사탕 준 것 때문에...? 이런 것 때문에 코피 흘리는 건 영화나 드라마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도경수 라는 인물은 항상 내게 여지껏 보지 못 했던 환상을 보여 주는구나 싶었다.

"전 팀장 님이 달로 이민 가겠다 해도 따라갈 겁니다."

아이 씨, 모르겠다. 냅킨을 테이블로 내던진 백현이 두 손으로 귀 언저리를 감싼 뒤 두 입술이 자연스럽게 포개어졌다. 그저 깊은 곳에서 부터 그러라고 명령한 듯 자신도 예상 못한 전개 였다. 슬며시 눈을 뜨자 지금 이상황이 너무 좋은 건지 뭔지 눈을 질끈 감고 있긴 했지만 웃고 있는 게 한 눈에 보였다. 입만 맞댄 경수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 왔다. 그래서 더 부끄러웠다. 아니, 내 심장인지 경수의 심장인지 잘 모르겠다. 다급하게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 자기가 더 쑥쓰러움을 타다니. 셔츠가 부스럭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턱이 움직였다.

경수는 맹세 했다. 하필 지금이 누나가 여행 중이란 것도 퇴근 하고 얘기 좀 하자던 백현, 이 두 사람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평생 잊지 않도록. 밥 먹다가 이게 무슨 횡재냐. 겹친 것도 모자라 불쑥 찾아 들어온 말캉한 것에 흐흥 하고 웃었다. 자기도 웃긴 모양인지 백현이 따라 웃었다. 참으로 많이 웃고 많이 야했다. 이 즈음이면 되었다. 만족한 듯한 백현이 입술을 떼어 고개를 뒤로 하려고 하자 경수가 집이 떠내려 가라 우렁차게 외쳤다.

"팀장 니임!!!"
"왜, 왜, 왜요!"

얼떨결에 손목이 콱 붙잡힌 백현의 덜렁이는 넥타이를 경수가 한 손으로 풀어 헤쳤다. 백현의 분홍분홍한 입술이 번들 거리는 걸 보고 있자 하니 못 견디게 섹시 했다.

"저희 내일 여행 빠져요."

그대로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 테이블에 골반이 부딪쳐 포크가 달그락 하며 아래로 추락했지만 괘념치 않아 했다. 저까짓 포크 때문에 내가 굽힐 것 같아! 왼팔을 백현의 무릎 사이에 넣더니 그대로 공주님 안기로 백현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냐고 버럭 버럭 거리는 백현을 데리고 무작정 어딘가를 향해 달렸다.

"팀장 님 저를 망가트려 주세요!!!!!! 아주 고장이 나게 해 달라고!!!!!!"

안겨 버린 건 난데 왜 그 말은 네가 하는 거야...! 괴물 같이 용케도 성인 남성인 백현을 안고 잘도 뛰는 경수의 귓가에 백현이 너도 한 번 당해 봐라 하고 소리 쳤다.

"알겠으니까 좀 내려 봐 이 자식아!!!"
"네."

말은 또 잘 듣는다. 경수가 백현을 조심스레 내리자 마자 반대로 경수를 들춰 안았다. 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무릎이 좀 아리긴 했지만 달리고 달리다 와아아아 하며 연신 이것도 재밌다고 말 하던 경수에게 방 몇개가 나오자 물었다. 뭔 놈의 집이 이렇게 좋아서.

"어느 방이야?"
"저기."

경수가 목을 끌어 안은 채 한 방을 향해 삿대질을 세우자 곧이어 또 달리면서 그새 방으로 들어 갔다. 빠르게 또한 더디게 백현과 경수의 마음은 커져만 가겠지만 언제 까지나 건재하길 바란다. 다만 팀장 없는 여행으로 사원들은 웃음꽃이 만개 하겠지만 두 쪽 다 행복한 길이라면 다시 선택 하라고 기회를 주어도 망설임 없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 한다. 방 안에선 온갖 행복의 소리가 날아 들었다.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초저녁 부터 집 안에선 하트가 무수히 채워질 정도로 애정은 넘쳐났다. 백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야망 따위 버리고 덧 없이 경수를 받아 들이기로 결심 하였고, 경수는 뭐... 두 말 할 것도 없겠지.

비록 사탕은 하루 일찍 받았지만, 곧 날이 넘어가면 발렌타인데이이다. 25년 인생 중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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