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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백일몽

기도 冀圖 2017. 2. 11. 22:14
어릴 적 한동안 시름시름 골머리를 앓았던 적이 있었다. 새로 산 손목 시계가 시간 불문하고 아무 때나 울려서 시계가 없는 교실 안에서 손목을 움켜 쥐고 있기 고군분투 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금은방에서 문제를 해결한 뒤엔 불안이 가셨지만, 그때 왜 고작 이 삐빅 소리 때문에 그렇게 크게 반응 했었지란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낯설었던 반 아이들 때문이었을까. 사소한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움켜 쥐고 싶을 만큼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 그랬던 걸까.

고등학교는 정말 조용히 다녔다.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말도 안 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도 같이 밥도 먹을 만큼 친했던 친구는 없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아니었던 자신이 학창시절을 허무하게 소비 하였다고 해도 괘념치 않아 하는 걸 보는 부모님은 기가 막혀 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애라고, 표정이 공허한 아이 라고, 가족들은 날 불렀다.

성인이 됨으로서 사회에 나와 난 굳이 인간 관계라는 게 꼭 필요한 건가, 생각 했다. 하지만 나에겐 이 문제를 상의 하고 의견을 나눌 친한 사람이 없다. 대학교는 뭐가 다를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일 하며 조용히 가길 원했다. 예전이나, 현재나.

"거기 들어 가면 안 됩니다."

웬 처음 보는 남자가 뒤를 돈다. 그 남자가 서 있는 방향인 방은 다름 아닌 굳게 잠겨 열린 적이 없던 빈 동아리방이었다.

"왜요?"

그렇게 된 이유는, 얼마 전 저 방 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이었다. 함부로 남과 섞이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도 지나가던 중에 껄쩍시러운 광경을 목격한 경수가 남자를 말렸다.

"...... 들어 가면 안 돼요."

그 사건 때문에 학교가 두 달이 지난 지금 까지도 떠들썩 했다. 학교 측에선 잽싸게 조치를 취하고 있는 와중에도 조용히 학교를 다니는 경수를 경수의 어머니와 아버지 께서 한 백만번은 바지자락을 잡아 당기셨던 것 같다. 경수는 자존심 때문인지 매일 꼬박 강의를 들으러 갔다. 신경질도 나긴 했다. 왜 하필, 이 학교에서.

"이 학교 다녀요?"

남자가 넉살 좋게 질문을 던진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살갑게 웃는 두 눈이 지나치게 친절해 보여서 였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지 않아, 절대로. 그대로 흘끗 쳐다 보고는 다시 등을 보여 버리는 경수의 뒤로 남자가 말 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전 16학번 건축공학과 변백현인데, 그쪽은요?"

얼굴을 쳐다 보지 않아도 실실 웃고 있을 것이 목소리로 뚜렷하게 배어 나왔다. 속는 셈 치고 딱 한 번만, 처음이자 마지막의 성의로 대꾸해 준다 치고 말 했다.

"동기네요. 국어국문학과 도경수 입니다."
"어, 근데 너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혹시 엠티 왔었어?"
"바로 말을 놓으시네요."
"그야 친구니까. 번호 교환 할래?"

친구. 정오임에도 학교 건물 안은 꽤나 우중충 했다. 이쪽 구관을 원래 사람들이 자주 들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살인 사건 때문일까 발걸음이 더욱 뚝 끊겼다. 경수 역시 마찬가지로 구관에 있는 도서실만 아니었다면 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닥 대화를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동갑이라 하여도 초면에 반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기분 더러웠다. 번호 교환을 원하는 의문문을 무시한 채 건너편의 문을 열어 제끼고 구관을 빠져 나가는 경수의 등 뒤론 여전히 그 남자가 빈 동아리방 문 앞에 서 있었다.






백도 백일몽
/기도 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인생이 이 세상이 모두 소설 속이라면. 정해진 스케줄 아래 살아 가는 인형들이진 않을까.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때론 이런 생각에 젖어드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괴이한 흐름으로 썩어 가는 세상은 인생에 도움이 되질 않아. 경수는 늘 혼자 살아 나갔다. 자신을 가엽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고. 무한으로 반복 되는 끝이 없는 실타래 였다. 식사를 해도 곧 배가 허기져지고, 이것은 남들 이야기겠지만 사랑을 해도 계속 사랑이 고파지고. 국어국문학과를 고른 것은 이런 것들도 한 몫 했다. 내 인생이 아닌 남들의 인생도 내가 한번 골라 보고 싶었다. 시인 중엔 사람을 미친듯이 사랑하는 시인들이 있다. 하지만 난? 아마 사람을 증오하는 시를 쓰지 않을까.

집 아님 학교. 학교가 아님 식당. 식당이 아님 도서실.

"밥 혼자 먹네?"

밀물과 썰물과 같은 달과 지구의 인력과 원심력에 의하여 발생하는 흐름에 변백현이라는 허점이 생겨났다. 학교 식당에서 얌전히 밥만 먹고 바로 집으로 귀가 하려던 일정이 어긋났다. 바로 앞자리에 식판을 내려 놓은 백현 때문에 반 정도 들려 있던 엉덩이가 다시 내려 앉았다. 아무리 사람이 싫다 한들 밥 먹을 때 먼저 일어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식 얼굴 보는 것 보다 내 기분 부터 생각하기 위해 경수는 고개를 돌리며 턱을 괴었다. 어째서인지, 그 날 구관에서 처음 통성명을 한 이후로 자꾸만 눈에 얘가 뵌다.

"돈까스 완전 눅눅해. 고기도 완전 A4용지 만해."
"투정 하지 마. 듣기 싫어."
"원래 밥 혼자 먹어?"

유일하게 좋아하는 게 있다면 집에서 무얼 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살림과 사무를 병행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괜히 취업이나 해서 대인관계니 상사니 뭐니 골치만 아플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 보다 경수 같은 다혈질적인 성격은 회사와 맞지 않았다. 예를 들면 소설가와 같은 혼자만의 세상에 스스로 갇힐 수 있는 직업을 선호하던 참이었다. 아직 공부할 것은 많지만 말이다. 데뷔하고 나서 좀 지난 뒤 자서전도 써 보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 된다.

"... 말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 봐?"

학교 식당은 텅텅 비어 있었다. 지역 곳곳에서 엽기 살인 사건들이 일어나며 이어서 우리 학교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휴학을 하거나 자퇴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모두 배상해 주겠다며 학교는 그들을 말렸지만 소용 없었다. 경수와 백현을 포함해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은 어림 잡을 필요도 없이 고작 일곱 여덟명이 끝이었다. 뭐가 그렇게 신경 쓰이는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경수를 백현은 밥을 우물 거리며 쳐다 보았다.

"뭐 찾,"
"넌 왜 학교 나와?"

되려 물어오는 경수를 보곤 백현은 음식물을 삼켰다.

"왜 나오냐니?"

경수는 눈이 정말 컸다. 안경에 가려졌음에도 큰 게 보였다. 눈이 안 좋나? 이런 멍청이 안경은 뭣 하러 쓰고 다니나 몰라. 경수는 갑작스레 궁금해졌다. 뉴스고 뭐고 매일이 난리인데 우리 학교에서 일어났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장 까지 모조리 방송국들이 취재해 간 탓에 위치 마저 모두 빠짐 없이 노출되어 있는데 그 장소도 어딘지 모르고 열으려 들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처럼 학교를 다니고.

"아, 살인 사건 때문에 안 무섭냐고?"
"... 어."
"당분간은 화 입을 일 없을 것 같아서."
"신종 허세인가."
"내 직감이다."

그럼 너는? 백현이 묻자 경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 했다. 백현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미 밥을 모두 먹어치운 지 오래 였다. 그의 입은 더이상 우물 거려지지 않고 있었다. 백현도 시간이 조금 지나자 더이상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국어국문학과 라고 했지? 나가서 뭐 하려고?"

친구 라는 명목의 사람과 대화해 본 적이 있기나 했었나. 줄곧 경수가 먼저 피하거나 남들이 피하기 일수 였다. 어차피 일찍 마무리 될 인연 굵게 끝내자는 의미로 대답 했다.

"소설가. 아마도."
"동화도 쓸 거야?"
"어린 애를 싫어 해서."
"에이, 내가 동화를 엄청 환장 하거든."

어른을 위한 동화, 어때? 괜찮지? 백현은 원래 혼자서도 잘 떠드는 성격인 것 같았다. 이런 애들은 청소년기에도 활발 했겠지. 나와 다르게. 왠지 모르게 살짝 질투가 났던 것 같다.

"어른을 위한 동화는 처음 듣네."
"왜, 네가 만들면 되는 거잖아. 성인판 피터팬이라든가..."
"그건 모작이야."

어른을 위한 동화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동화. 아이들의 동심 지킴이와 같은 왕자와 공주등이 등장하는 간단한 내용의 그림 소설. 그래서 그걸 쓴다고 해서 좋아할 사람이 변백현 말고는 더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를 않아서 기분이 언짢았다. 웃긴 놈이네.

"네가 왜 밥 해라 죽 쒀라야."
"나 생일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선물인 셈 치고 하나만 써 줘라. 가보로 삼게"
"참 뻔뻔하다. 이러는 거 미술과 불러다가 자화상 그려 달라는 거랑 다를 거 없는 거 아냐?"

문득 바깥을 보는데 밖은 너무나 한적 했다. 물론 변백현과 나 처럼 한가롭게 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넉넉히 있긴 했다. 하긴, 다니는 사람 보다 주위 사람들이 더 팔짝팔짝 뛰지.

"넌, 보고 있으면 항상 속으로 뭘 웅얼 거리는 거 같아."

흠칫해 버리고 만 경수가 자리서 벌떡 일어섰다.

"신경 꺼. 다신 아는 체 하지 마라. 학교 조용히 다닐 거니까."

백현이 더 신중하게 굴었음 좋겠다고 생각 했다. 경수가 식판을 들고 훽 가 버리자 백현이 자신의 식판을 들고 쫄랑쫄랑 쫓아 오면서 말 했다. 헤실헤실 거리는 웃을 매단 채.

"내가 친구 해 줄게. 그리고 성인판 피터팬 약속한 거다."

무시하면 돼. 모른 체만 하면 돼.

"난 오늘 공강인데, 어디 가? 집? 우리 집 가서 겜 할래?"

'오늘 공강인데.' 경수의 머릿속에 크게 물음표가 그려졌다. 공강인데 학교를 왜 나오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불편해서 그런 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어중간한 행동만 하게 될 것 같았다.

"어디 살아? 기숙사?"
"제발 입 좀......"

옆이 시끄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가족과도 함께할 시간이 굉장히 적었기 때문에 이런 시간은 더욱 어깨가 무거워져만 갔다.

"내가 사람과 오래 어울려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많이 불편해. 좀, 꺼져..."

그렇기에 누군가와 싸워 본 적도 없다. 오롯이 도서 속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아직 까지도 누군가에게 묶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책으로 모든 것을 배웠다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몽상하기도 잠시 이런 생각이 들면 난 너무나도 서러워진다.



*



"경수야!"

오늘도.

"경수야."

오늘도... 마주쳤다.

"경수 맞네."

또.

"경수 씨."

경수가 왈칵 울화통이 받쳐 올라서 외쳤다.

"너 자꾸 내가 가는 데는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우연이야."
"설마. 통성명 전 까지 난 너랑 마주친 적이 없어."

변백현이 경수에게 아는 체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목이 쏠린 것은 당연 했다. 집 근처에다가 졸업 했던 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대학이라 동창은 물론이요 경수가 음침한 아우라를 가진 사람이란 걸 아는 사람들 투성인 게 이유다.

"기분탓이겠지."

백현은 경수의 앞에서 웃는 날이 부쩍 늘었다. 경수는 그 모습이 더 못마땅 했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있었다. 이런 변화된 자신이 더 못나 보였지만 구름에 나앉은 것 처럼 두리뭉실한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옆이 시끌벅적해진 것이 이젠 당연지사해지고 있다. 이런 데에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건데. 아직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만약, 실수하면 어떡하지 라는 쓰잘데기 없는 걱정 때문에 한 순간 내가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매일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긴 딸기 타르트가 맛있어. 철이 좀 지나서 싱싱할진 모르겠는데. 딸기 좋아해?"

어느새 카페에 와 둘이서 간식을 먹을 사이가 되었다. 경수는 최대한 좋게 생각 하려고 하고 있다. 처음 사귀어 보는 본격적인 친구.

"... 어."
"주문 하고 올게."

자꾸 학교에서 마주치는 이유를 모르겠다만 주위가 심심하지 않다는 게 생소하긴 마찬가지 였다. 매일 테이크아웃만 죽어라 했었던 카페에도 앉아 보고, 관심도 없던 sns 어플을 깔아도 보고. 모두 백현의 영향이 컸다. 대화 목록엔 변백현 하나 뿐이지만... 휴대폰이란 건 그저 시간 보고, 시간표 보고, 인터넷 서점을 들르고. 그저 이게 끝이었다. 아, 날씨 보고, 뉴스 보고... 까지. 과제 같은 건 컴퓨터로 다 하니까.

음식과 함께 온 백현이 자리에 앉아 또 그에게서 수다의 시작임을 알리는 말이 터져 나왔다.

"방학 땐 뭐 했어?"

틱틱 거리는 건 줄었지만 여전히 단답형인 대답은 어쩔 수가 없었다.

"시골."
"쭉?"
"응."
"공기 좋고 물 좋고~ 부럽다. 난 집에서 하도 살 빼라고 구박해서 헬스 하느라 요절 하는 줄 알았다."

덕분에 몸짱이 됐지. 그 말에 경수가 픽 웃었다. 먼저 살풋 웃은 건 경수인데 변백현은 왜 지가 더 호탕하게 웃는지 모르겠다. 마치 거짓에 현혹된 백설공주 처럼. 시원한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메리카노에 꽂힌 빨대를 물고 쪼옥 빨았다. 아직 아이스를 마시기엔 이른 날씨이긴 하지만 괜찮다. 추위를 그닥 많이 타는 편도 아니었으니.

"또, 신데렐라 구두도 찾아 주고."
"너무 망상이다."
"진짜야. 그리고 내가 고등학교 때......"

무슨 말이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한 귀로 들리는가 싶더니 금방 또 한 귀로 흘러 내리고 있다. 자꾸만 식은땀이 났다. 저 놈이 혼자서 막무가내로 약속해 버린 피터팬 모작이 자꾸만 잠에 들려고 하면 천장에 큼지막한 글자로 두둥실 떠 다녀서 바람 대로 제 스타일로 써 오긴 하였지만 건네주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굴 보고는 절대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사물함을 찾아 넣기로 했다.

"듣고 있어? 너 원래 땀이 많았던가?"
"이만 갈게."
"야 타르트에 입은 대고 가야지."
"아, 그래. 타르트..."

이 순간 과일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내가 너무 끔찍이 싫었다.



*



고등학교 때, 우연히 학교서 마주친 엄마가 나를 당장 정신병원에 가둬 놓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아이들의 수마를 모두 견뎌 내고 있었고, 보다 못한 엄마가 학교에 콜을 하였지만 유일하게 변화가 없는 것은 '나' 였다.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거라 생각한 나머지 나를 의사와 대면하게 만들었다.

'경수, 오랜만이구나?'

그 무엇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말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난 흘러 나오는 대로 말을 뱉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중학교는 현재와 같이 내내 혼자 였다고.

'혹시 네가 스스로를 혼자로 만드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전 괴롭지 않아요.'

왜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죠? 약도 듣지 않았고, 그 어떤 치료로도 난 늘 같았다. 애초에 약 따위가 건드리며 거스를 일이 아닌 듯 하기도. 그 이후론 더욱 남 앞에서 나 자신을 숨기는 것에 더 철저하게 행동 했다. 결국 이것을 끝으로 3개월 만에 퇴원 했다. 병원은 말 했다. 저건 불변이다. 성격이니 일상 생활에서만 더 다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정신병원은 너무 음침해. 하지만 무섭지 않았어. 신기한 점이 있다면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그 전 유아기 까지의 기억이 일절 없다는 것이었다. 새카맣게 칠해진 도화지 처럼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아, 그 때 선생님 께 물었었다.

'잊은 게 아니야. 누구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생각이 나지 않을 뿐이란다.'

여기서 왠지 모를 안심이 들었던 것 같다. 남들과 같은 게 하나 라도 있구나. 그 여자가 왜 오랜만이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친화적인 느낌을 주려고 그랬나.

"어, 왔어?"
"늦은 밤에 불러내고, 잘 한다."

강 앞 달에 비추어 이슬 반짝이는 푸른빛 잔디 밭에 앉아 캔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백현의 옆에 앉았다. 아... 너무 붙어 앉았나. 경수는 백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옆으로 빠졌다.

"난 잘 모르겠어. 동화들은 왜 그리 슬픈지."
"다 해피엔딩이잖아."
"애들을 위해 미화한 거잖아. 다 해피엔딩이라 치면 인어공주는 뭐고?"
"어쩌면 그 편이 미화된 걸 수도 있어."

문과랑 대화하기 힘들다. 백현이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며 생수 마시듯 캔맥주를 마셨다. 또 다른 캔을 집어 경수에게 건네자 흘끗 보고는 다시끔 강을 바라 보며 고개를 젓는다. 나이가 몇인데 동화에 이렇게나 집착 할까. 늦은 밤에 갑자기 집 근처라며 부르더니 다짜고짜 동화 얘기 부터 꺼내네.

"이사 안 해서 다행이다."
"뭐?"
"아니, 아.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말이 헛 나왔네."

배시시 웃는 꼴이 왜인지 애처로워 보였다. 막상 또 경수는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 했다. 늦은 밤에 친구를 만나는 것도, 술 마시는 친구를 상대 하는 것도. 모두 처음이다. 처음이라는 건 항상 설레면서도 명치 쪽이 아린 그런 느낌이구나.

"난 동화가 너무 좋아... 미치고 환장 하겠어, 하..."

백현이 풀밭으로 드러눕는다.

"진드기 붙어. 일어나."

걱정인가. 옆에 있는데 더럽게 이런 청결하지 못한 데에 누워서 그럴까. 하지만 곧 머리가 위에서 부터 지끈 거려져 왔다. 사람을 안 만나도 너무 안 만나서 공황 까지 오는 건지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 였다. 이마에 두 손바닥을 짚었다가 뗀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뒤로 돌아 뛰자 마자 누군가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사과할 새도 없이 경수는 곧바로 집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머리 가운데가 사과 쪼깨듯 갈라질 것만 같았다. 왜 이래, 나 왜 이래. 이렇게 초조 했던 적이 없었다. 왜 아프지? 왜 이렇게 아프지? 죽을 병에 걸린 것 처럼 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지? 집으로 달려 들어와 방으로 빠르게 들어간 경수는 옷도 갈아 입지 않고 이불과 이불 사이에 구겨져 한참을 뒤적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깊은 수면의 세계로 잠겨들 때 까지.



*



"16학번 국어국문학과 도경수 라고 합니다. 동기 사물함 좀 찾으려고 하는데요."

행정실에 방문한 경수가 어색하지만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그 일 때문이었을까, 행정실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낯빛이 어둡다 못해 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말씀 하세요."
"아, 건축공학과 변백현 입니다."

내부는 다소 고요 했지만 공기는 따스했다. 강의실은 완전 북극이 따로 없는데. 계절은 이미 봄이지만 이상기후가 발생 하면서 부터 어느새 겨울과 여름의 경계에 자리하던 봄이라는 게 사라졌다. 추위는 아직 매서웠고, 북부지방엔 아직 까지도 눈이 내렸다.

"그런 학생 없습니다."
"예?"
"아예 입학 절차를 밟은 흔적도 없는데요?"

당황한 경수가 오갈 데 없는 손을 방황 시키며 말 했다.

"휴, 휴학 하거나 자퇴한 사람 중에서도 없어요?"

잠시 모니터를 유심히 보는 듯 하더니 재차 말 한다.

"네. 없습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아, 감사합니다. 수고 하세요."

돌아섰다.



*



"허억... 헉... 헉, 헉..."

행정실에서 나와 문고리를 살며시 돌려 조용히 문을 닫자 마자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혀 끝 없이 달린 것만 같았다. 눈을 부릅 뜨며 바라본 뒷통수는, 누가 봐도 변백현이었다. 말 수가 없는 자신이었지만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다.백현은 경수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구관의 도서관 반대편의 복도로 향했다. 운동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지구력이 약했다. 숨이 너무 찼다, 목구멍에 피가 끓을 만큼.

언뜻 본 백현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숨이 차서.' 이것은 단순간 핑계다.

"이제 겨우 평범 할 수 있다고 생각 했어. 넌 왜 나를 매번 가만히 두질 않아?"

평범 할 수 있다고...? 어지러웠다. 백현이 잡고 있던 경수의 손목을 고개 옆 벽으로 붙였다. 일찍 소등 되는 구관에, 도서관도 없고 그 무엇도 없는 이 외진 복도는 특히나 잿빛이 가라 앉아 있었다. 어린이 영화에나 나오는 어둠 속에 사는 괴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보다 두려운 것은 코 앞에 있는 변백현이다만.

"말이 많아야 할 건 나야."
"......"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고, 왜 항상 내 곁에 나타나?"
"그건,"
"네가 날 쫓아 다녀서겠지. 이 학교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다 순 거짓말이었어. 골탕 먹이니까 이제 좋니?"

화가 났다. 그냥 왕창 분노를 쏟아 내고 싶었다.

"내기 라도 했냐? 한방 맞은 표정이다, 너. 그 표정 지어야 할 건 오히려 나 같은데."

백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자꾸 시선을 피하는 경수에 비해 백현은 단 한번도 시선을 내린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적반하장, 아닌가... 이거. 백현이 시선을 맞추려고 하며 어쩌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부릅 트여 있었다. 그의 입에 예상도 못한 말이 나왔다.

"네 기억에 없는 초등학교 시절이 궁금해? 거기에 내가 설켜 있다는 걸 알고 나서의 네 표정이 난 더 궁금해."

어쩐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듯한 공포 였다.



*



"형은 오늘도 혼자네."

초록색 스프라이트 티를 입은 경수가 백현의 옆자리 그네에 와 앉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백현은 웬 모르는 꼬마 애가 아는 척이지, 생각 하며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 보았다.

"나 여기 맨날 와서 형 맨날 봤어."

꼬마는 자신이 10살, '도경수'라고 소개 했다. 백현도 자신이 '변백현', 고등학생이라고 맞받아쳤다.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어 주황빛이 활개치고 있었다.

"밥 먹을 때 아니냐. 집에 가."
"엄마 바빠. 집 가면 나 혼자 밥 먹어야 돼."
"아빠는?"
"아빠두."

크크. 의미 모르게 웃으며 백현은 다 먹고 남은 나무 막대기만 잘근잘근 씹었다. 스니커즈로 애먼 모래만 긁적였다. 경수가 바닥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허공에 흔들며 말 했다.

"형아도 집에 아무도 없어?"
"응."
"그럼 우리 집 가서 밥 먹자. 안 심심하면 좋잖아."
"그럴까..."

처음 본 애가 자기네 집에서 밥 먹자고 해서 막상 따라가는 건 집주인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갑자기 가자는 애 따라가는 것도 그닥 내키는 건 아니었지만 허물 없는 도경수 라는 꼬마가 마음에 들었다. 짜식, 상남자네. 그 날, 처음 만난 꼬맹이 손을 잡고 가면서 형이 무섭지도 않냐고 물었고, 꼬맹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 했다.



*



"오늘도 경수 좀 잘 부탁 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 버렸지 뭐야."
"조심히 다녀 오세요, 어머님! 경수도 인사 드려."
"엄마, 갔다 와~!"

그대로 어머님은 집을 나서셨고 백현은 경수에게 꿀밤을 놓았다.

"다녀 오세요, 라고 해야지 멍청아."
"몰라."

그 날 이후로 경수가 백현이라는 형 이야기를 어찌나 많이 했는지 어머님 께선 저녁 시간에 시간을 내어 집에 오시면서 까지 백현에게 고맙다며 식사를 대접 했다. 덕에 원치 않게 매일 경수를 놀아 주는 베이비시터가 되어 버렸지만은. 경수의 부모님은 주말 불문하고 출근하기 바쁘셨다. 줄곧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잠시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경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셨나 보다.

난 집에 아무도 없다. 어머니는 산모사망으로 일찍 돌아 가셨고, 아버지는 매일 빠듯한 생활비를 위해 밤낮을 불구하고 일을 하러 다니셨다. 그래서 따로 산다. 난 원래 집에, 아버지는 숙소에. 그 스트레스로 가끔 집에 오시면 나에게 손찌검을 하시긴 하지만 참을만 하다. 그래서 집은 내가 없으면 매일 텅텅 비어 있다.

경수와 알고 지낸지 어느덧 석달 째. 먼저 학교가 끝난 사람이 학교 앞에서 기다려 주는 것은 어느 사이 습관 처럼 돋아 났다. 나 역시 친구들과의 약속을 제치고 외로운 꼬맹이 경수 놀아주기에 전념 했다. 또래와 노는 것 보다 어린 경수와 노는 게 훨씬 즐거웠다. 경수가 원하는 동화 속 내용으로 상황극을 하며 놀기도 하지만, 대부분 용사와 괴물이 싸우는 내용이라 우린 항상 조그마한 상처를 달고 지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너무 재미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기 까지 갓 심은 둥근 씨앗 같던 경수는 무럭무럭 자라 갔고, 난 군입대를 며칠 앞두고 있는 채 였다.

"형, 군대가 거기지? 총 갖고 막."
"맞아. 멋있는 총으로 나라 지키러 가는 거야."

열세살의 경수는 내년이면 중학교에 들어 간다. 더이상 꼬맹이 라고 부르지 못할 만큼 키도 훌쩍 자라 있었고, 오목조목 하던 이목구비는 어느새 성숙한 미가 묻어 있었다. 많이 컸다. 하며 경수의 머리를 헤집어 놓는 백현은 그 날 펑펑 울었다. 왜 울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린 아이 였던 경수가 이렇게 커서는 한결 굵직해진 목소리로 형- 하고 불러서일까. 겨우 3년 같이 지낸 것 뿐인데 백현에게 경수는 너무 각별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우정의 증표 라며 문구점에서 구매한 싸구려 은색 반지를 백현의 손가락에 끼워준 경수는 항상 같은 동화들만 읽었다. 아니, 읽었었다. 지금의 경수는 너무 커 버려서 책은 거들떠도 보지 않기에.

빛이 없던 내 삶에 오아시스 처럼 다가와 웃게 만들어준 경수와 경수가 가진 동화책. 넌 더이상 동화를 보며, 나와 동화 속의 인물을 흉내 내지 않아. 장난감 칼을 들지도 않고, 어설프게 공주인 척을 하려고도 하지 않아. 내가 휴가를 나올 때 마다 그리고 전역 하고 나면. 너는 더욱 커 있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았던 그 때 그대로만 쭈욱 지내고 싶었다. 백현의 동공이 차츰 떨리기 시작 할 때 즈음 멍하니 서 있던 그가 이상했던 모양인지 티셔츠를 쥔 경수를 시야에서 발견 했다.

...... 군대를 안 가면 되잖아.



*



"열세살의 너를 강간 했어. 그리고 넌 가지고 있지도 않을 우정 반지를, 난 아직도 끼우고 있지."

경수의 자욱한 눈동자에서 큼지막한 눈물이 떨어졌다.

"난 열살의 널 너무나도 좋아 했어."
"... 그, 그. 그..."
"그리고 나선, 너희 어머니 께서 날 구속 하셨어. 또 어떻게 됐는 줄 알아?"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완전한 밤이 올 차례가 된 것이다. 백현은 변해 가는 경수를 여전히 원망하며 추억을 갈구하는 '미친놈'이다.

"과로사로 돌아 가신 우리 아버지가 있는 돈 다 끌어 모아다 준 합의금으로, 네 기억을 없애기 위한 최면요법에 다 쏟아 부으셨어. 하지만 버티기에 네 정신력은 너무나 어렸지."
"......"
"대인기피증에 우울증. 기억의 조각만 사라졌지, 넌 지금 까지 자폐아 처럼 살아 온 거야."

나 때문에. 그 한마디에 경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으려는 걸 백현이 어깨를 잡아 주었다. 어이 없다는 듯 웃는 모습엔 광기가 잔뜩 광포해 있었다.

"난 너도 좋아 할 줄 알았다. 내가 너에게 물었거든. 이 형아가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도울 수 있겠냐고."

그저 태어났을 때 부터 태생이 이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내 인생을 망쳐 버린 장본인이 변백현이었다니. 바로 믿을 수 있을 만한 이유는 충족될 수 없었지만 자꾸만 머릿속에서 과거의 형체가 그려지는 게 정말 현실이 와닿아 오는 것만 같았다. 마치, 실제로 있던 일인 것 처럼.

"네가 날 증오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 까진 바라지 않았어."

꼭 나에게 그랬어야만 했니? 백현이 애달픈 눈망울을 비춰내자 경수는 끝 까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모두 꽁꽁 얼려 놓았던 기억의 빙하가 사르륵 녹아 내리면서 경수는 열살의 아이 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는 백현은 입술을 앙 다물며 고개를 주억 거렸다. 기뻐서 우는 거지? 그렇지? 경수가 폭포수 처럼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좌우로 젓자 백현이 두 볼을 확 잡아 자신을 따라 주억이게 만들었다.

"...... 옳지, 그래..."
"......"
"넌 날 잊었어. 완전히 잊어 버렸어. 어쩌면 이번이 기회 라고 생각 했어. 나는 내가 사고 친 현장을 구경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 때 우연찮게 널 만났지. 평범하게 널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온 거야."

두 볼을 보드랍게 감싸 주었다.

"경수야."
"......"
"형은 아직 까지도 동화를 좋아해."

거부하고 싶은 듯 이를 악 물어 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너무 두려웠다. 혀 라도 깨물어 볼까, 싶었지만 볼을 억누르고 있는 백현의 악력이 더 강했다. 과거를 일깨우고 싶은 악착같은 욕심이 불러온 불화 였다.

"오늘 피터팬 놀이 할까? 피터팬 하고 후크선장 싸우는 거 좋아 했잖아. 대답 좀 해 봐, 경수야."

아무 말이라도 해 줘. 백현이 벙어리 같은 경수에게서 한계를 느끼려고 하는 듯 했다. 또 다시 내딛게 될 줄 몰랐던 절벽에 오른 건 내가 아니라 우리야. 우리, 함께야. 언제 까지고 우리 둘 다 지난 과거들에 아프게 될 거야.

"형을 좀 가엽게 봐 줘, 경수야. 경수야, 듣고 있니?"



*



"하으억, 허억... 헉..."

눈을 번쩍 뜬 경수가 '또' 시달린 악몽에 급해진 숨을 몰아 쉬었다. 자면서 울고 있던 모양인지 '또' 목이 잔뜩 매어 왔다. 이미 굳어 버린 눈물 자국 때문인지 안면이 갑갑했다.

"... 어어 경수야, 으응... 나 여기 있어."

익숙하게 잠결에 몸을 틀어 경수의 머리통을 감싸 안아오는 백현은 이후 또 잠에 들었다. 한바탕 거대한 것이 지나간 이후 꾸는 악몽은 한결 같이 똑같았고, 한결 같이 괴로웠다. 지난 시간에 아파 하는 우리 둘을 보면 똑같이 아팠고, 또 서로 미워하며 또... 사랑 했다.

백현은 동거하기 시작 하면서 우리의 어릴적을 '백일몽'이라고 부르자고 제안 했다. 악몽은 항상 어린 내 위에 있던 백현이 형이고, 우린 함께 울부짖으며 피칠갑이 된 채로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한 과거 모두, 나만이 매일 꾸는 꿈도, 모두 헛된 망상이라고 해서 백현은 그것을 악몽이 아닌 백일몽이라고 부르게 했다.

내 말 수는 원래 횟수 보다 부쩍 줄어 들었고, 백현은 굳이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런 순환 속에서 평화를 추구 하려 드는 건방진 태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니어 보였다.

이제 와서 평범 하려고 해 보았자 헛수고이겠지만, 우리 둘 모두 다 못다한 사랑을 하며 죄책감을 덜기 위한 행위인 것만 같았다. 난 여전히 과거에 대한 기억이 뿌옇고, 어리숙한 실루엣에 대조 되는 백현을 보면 토기가 쏠려 화장실에 달려 가는 일이 잦았지만 어차피 한 평생 이럴 거 적응 하면 되겠지. 우린 평생 온전치 못할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차라리 이미 꺾인 김에 하루살이 꽃인 인생인 편이 나았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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