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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

향수

기도 冀圖 2018. 6. 9. 23:29
"나가 봐."

무언가를 탁자 위에 내려둔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간다. 젖은 수건을 집어들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듯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위의 식은땀을 닦는다. 식은땀에 젖어 가는 경수를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부터 축축해지는 것만 같았다. 기분마저도 비를 맞은 종잇장같이 눅눅해진다. 대신 아파 주고 싶은 것처럼, 대신 땀을 흘려 주고 싶은 것처럼. 행여나 작은 바람에도 감기가 더 심해질까 창문들도 꽁꽁 닫아 놓았더니 공기가 조금 더웠다. 땀자국이 난 볼을 닦아 주던 찰나에 경수가 말했다.

"왜 말이 없어?"

침대 시트를 짚고 있던 손을 괜히 꽈악 쥐었다.

"열이 38도가 넘었어. 힘들면 날 부르면 됐잖아."
"당신을 불러서 뭐?"

백현은 최대한 차분한 투로 말했다.

"너 곧 국서야. 추우니 창문을 닫아야겠다, 이런 간단한 판단도 못 해?"
"당신이 수시로 오면 되잖아."
"결국 나더러 다 해 달란 소리잖아."
"당신 일이잖아."

....... 맞는 말이다. 안 그래도 예민한 경수에게 그저 아픈 게 속이 상해서 말을 막 뱉게 된 모양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경수의 땀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새삼 또 참 몸이 약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약해 마력을 쓸만 한 기운도 없고, 정신도 쇠약해진 너에게 난... 그저 감기에 걸릴 때면 땀을 닦아줄 인물 밖에 되지 못 한다는 게 가슴 저리다. 체온에 의해 미적지근해진 물수건을 쥐던 손에 힘을 빼자 침대 시트 위로 손이 힘없이 떨구어진다. 이마를 숙여 경수의 팔에 기대었다.

"내가 아프고 싶다. 전부."

먹먹해진 목소리로 백현이 말을 잇는다.

"원하는 건 그뿐이야."

이곳 지하 세계에 사는 악마들만 유일하게 회복 능력이 월등해 상처가 빠르게 아문다. 계열이 높을 수록 더, 더, 더 빠르게. 하지만 역시 예외는 존재했다. 회복,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선천적으로 어딘가가 불구로 잉태된 악마는 계속 그렇게 살다 죽을수밖에 없다.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천계에서 내려온 의사란 자가 곧 죽을 거라더라.

내쉬면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경수가.



*



지상의 구미호란 요괴는 오십년을 살면 여성이 되고, 백년을 살면 무녀가 되고, 천년을 살면 하늘과 통하게 되어 천호가 된다고 한다. 난 천년을 살아 무얼하고, 오천년을 살아 무얼할까. 이 숨통을 감싸는 잿빛을 보며 몇천년을 살아왔는 지 모르겠다. 어쩌면 몇만년, 몇십만년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여태의 내 삶이 100년이라고 치면 경수를 돌본 시간은 고작 2년 쯤이나 되었을까.

'불쌍하면 쳐다만 보지 말고 데려가 주세요.'

흙바닥에 홀로 앉아 있는 어린 널 보고 대체 어떤 생각이었는지, 난 하인들의 만류에도 개의치않고 다짜고짜 반이나 작은 네 손을 잡고 성으로 데려와 음식을 먹였지. 기나긴 생을 살아 오면서 과거를 되돌아 보면 꼭 1cm도 못 미치게 압축된 것처럼 한없이 짧게만 느껴졌다. 하얗고, 굵고, 기다란 경수의 손가락을 눈으로 훑으며 매만졌다.

"손바닥에 손 전체가 포옥 들어왔었지. 손가락으로 감싸면 손등도 뵈지 않았고."

그 손이 이렇게나 커져서는 백현의 손바닥과 맞먹는다. 콜록, 콜록. 경수가 얕게 기침을 할 때마다 심장이 쿵쿵 거렸다. 낡고 녹이 슬어 제 구실을 하는 줄도 몰랐던 심장이 힘차게 뛰었다.

"그거 다 욕심이야."

고개를 들어 경수와 눈을 마주했다.

"대신 아파 주고 싶다는 말이랑 내가 조금만 아픈 체를 하면 타박을 하는 거."

경수의 표정이 점점 상기되어 간다.

"원래 인간이나 우리들이나 죽어가며 산다지만, 몸이 안 좋은 내 시간은 좀 다르잖아. 더 빠르게 흘러가잖아."

지하 세계의 창조주로서, 신 하데스로서 죽지 않는 불멸의 몸으로 살아가는 백현. 그리고...

"이미 오늘 내일 중인 나에게 그런 걸 바라지 마. 훗날, 훗날에... 정말 내가 죽으면 마음이 더 무거워질 거야. 당신은 더 기나긴 생을 살아야 하잖아."
"......."
"내 아픔에 너무 집중하지 않았으면 해."

백현은 살며시 미소를 띄우며 경수의 어깨에서 조금 흘러내린 겉옷을 올려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하루라도 더 살았으면 하는, 그런 욕심을 버리란 소리 같았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나중의 내가 힘들어질 테니.

"내 걱정은 마."

호수에 던져진 돌은 바닥까지 내려가 호수가 메꾸어질 때까지 그 안에서 머무른다. 물살을 맞으며, 물 속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고, 물과 함께 갇혀 살아가고. 욕망에 빠지고, 나태에 빠지고, 분노에 빠져 죄값을 물기 위해 백현의 손아귀 안에서 무참히 죽어나간 목숨들이 무색하게 경수의 명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죄목이 있던 자들과, 경수는 어긋난 부분이 있는 것 같기야 하지만 감정도 무엇도 없던 것 같은 자가 이리도 슬퍼하는 것이 모두의 눈에는 생소해 보였다.

지하 세계는 백현으로 인해, 백현으로부터, 백현 때문에 존재한다. 즉 지하 세계가 곧 백현이고, 백현이 곧 지하 세계이다. 이 넓디넓은 지하 세계의 하늘은 늘 회색의 잿빛이지만.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붙잡지 말 걸. 살고 싶다고 발버둥 치지 말 걸. 한낱 부모도 없는 나 따위가..."

날이 갈수록 하늘은 더 짙어져만 가고, 매일 거센 바람이 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야위어보이는 어깨를 감싸 안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부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경수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은 채 숨을 쉬었다. 수심이 깊은 바닷속에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가라앉는 중인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네 향을 담은 향수라도 만들까..."
"......."
"무얼 해야 내가 수천년 후에도, 수만년 후에도 널 기억할 수 있을까."

백현이 고개를 들어 손가락으로 경수의 콧날이며 볼이며 입술을 느릿하게 스쳤다.

"네 얼굴이 또 만지고 싶어지면, 그때가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볼을 만지던 백현의 손가락 위로 눈물이 닿아온다.

"네 앞에서 자꾸 이러면 안 되는 건데."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아이를 보며 백현은 참 안 됐다고 생각했었다. 성에 아무나 들이지 않는데도 아이를 데려왔던 것은, 그저 호기심에서였다. 무슨 일 때문에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나. 큰 눈과 도톰한 입술. 진한 눈썹.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일까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는 얼굴이었다.

경수가 기어이 미간을 찡그린다. 백현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대면서 작게 말한다. 살고 싶다, 라고. 그리곤 피가 넘어올 듯한 힘겨운 기침을 내뱉는다. 손에는 백현이 인간 세계에 올라가 찍었던 사진을 꼬옥 쥔 채로.



*



처음으로 지하 세계에 비가 온 날이었다. 천둥이 치면서 수많은 나무가 불에 타 버렸고,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에 이곳 저곳이 침수 되었다. 위에서 물 줄기가 쏟아지는 것을 본 악마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하고, 비는 멈출 줄을 몰랐다. 부재인 백현 대신에 대변인이 나타나 모두 거처로 귀가하란 명령을 내리고 나서야 지하 세계는 그나마 조용해졌다. 그 시각 백현은 서재에 가만히 앉아 창밖으로 바깥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지하 세계엔 계절이 없다. 그러므로 다 제각각으로 옷을 입고 다닌다. 반팔이든, 긴팔이든, 무장복이든.

아까 즉 모두가 잠에 들었을 시간에, 경수의 기침 소리를 듣고 백현은 서재에서 경수의 방으로 뛰쳐 나갔다. 경수는 별 것 아니라며 잠이 안 오니 함께 서재로 가자고 하였다. 백현은 경수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걸이에 맞추어 걸었다.

'기침이 더 심해진 것 같아.'

경수는 아니라며 살풋 웃었다. 그리곤 과민반응이라며 백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톡, 쳤다. 서재로 들어와 경수는 백현의 허벅지 위에 비스듬하게 앉아 함께 회색으로만 가득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인간 세계의 하늘에 박힌 별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 널 데리고 인간 세계를 가 보지 못했구나. 별 보러 꼭 가자. 같이 가자. 경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움츠리며 백현의 어깨에 기대었다. 백현은 그런 경수에게 팔을 두르곤 머리칼에 고개를 살며시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영원히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신 자리를 빼앗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고요했다. 경수와 마시는 이 텁텁한 회색 공기도, 불을 켜지 않은 서재 안도.

내 심장 소리가 들리고 있을까.

이렇게나 열심히 요동을 치고 있는데.

툭, 무언가가 떨구어지는 소리에 백현은 눈을 떴다. 늘 손에 들고 다니던 제 사진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순간의 판단이 백현의 숨을 막히게 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

'경수야.'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자는 중이야?'

추욱 늘어진 경수는 말이 없었다. 잠에 든 모양이구나. 목이 메어서는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더 움츠러진 듯한 경수의 몸을 더 끌어안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렀다. 백현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곧바로 지하 세계의 하늘이 울기 시작하면서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엔 나도 널 지킬 수 없구나. 죽어가던 널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던 자신이었기에 경수가 떠나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육체. 육체만 두고 경수는 떠났다. 그때 바로 바로 지하 세계의 비 소식을 들은 백현의 형제자매이자 다른 세계의 신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들을 했다. 아, 그 아이가 죽었나 보구나.



*



"하데스 님!!!"

열명에 달하는 인원이 백현의 침소로 들어와선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울던 백현을 강제로 앉혔다. 심장으로부터 솟구치는 피는 곧바로 멎으며 상처가 아물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백현을 하인 세 명이서 붙들었다. 하지만 세 명으론 역부족이었다. 더 많은 인원이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백현은 그냥 칼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백현에 덩달아 하인들까지 백현의 피 때문에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계열이 높은 악마라 한들 신인 백현을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수장이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데 가만히 있을 악마들은 아니였다.

"제발, 제발 죽게 해 줘. 죽게 좀 나둬 줘."

널 보낸 지 겨우 닷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천년이 흘렀던 시간보다 느렸다. 하데스의 사무치는 슬픔에 지하 세계의 온 악마들이 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나 찬란할 수 없었던 경수의 미소가 눈 앞에 스쳐지나갔다. 미쳐 가는 것 같았다. 내 살을 깎아서라도 네 아픈 심장을 고쳐 줄 걸. 그런다고 고쳐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백현은 계속 미련 가득한 말만 뱉었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경수는 제가 만들어낸 거품인 걸 알면서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새벽마다 네가 내게 내려와 문을 두드리는데 어찌 내가 살 수 있겠단 말인가. 이를 악 문 백현은 칼을 도로 집어 다시 심장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제발, 좀 아팠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어떻게든 너에게로 가고 싶다. 고통 없는 칼집에 마음만 더 젖어 가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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