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백도

기도 冀圖 2018. 4. 14. 22:00
여느 때와 달리 날씨가 우중충하던 날이었다. 지구는 우주로 온통 둘러싸인 채 자전한다. 그 안에서 난 살아 숨 쉬고 있다. 믿기면서도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사실이다. 나도 언젠간 죽고, 다른 사람들처럼 여러 감정들을 느끼며 여생을 살 테지만 우주란 건 무얼까. 감정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믿기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모든 걸 초월하는 광활함 속에서 나는 분명 살아있는 게 맞을까.

"왜 잘 해 줘요?"

백현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꼬옥 쥔 경수의 손등을 엄지로 쓸어내리기만을 반복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경수는 백현을 쭈욱 쳐다보았다. 하늘, 땅 그리고 바다. 사람, 동물, 무생물 모든 게 꿈만 같다. 눈을 감았다 떠도 모두 그대로이지만 이상하게도 실감이 나는 것들은 소수였다. 내 환경, 내 자산, 내 집. 정신이 몽롱하다. 차창만을 바라보는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나무마냥. 왜 잘 해 줘요? 그 말의 대답은 경수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하지만 말을 꺼낸 이유는 그냥 백현의 정곡을 찔러 보고 싶어서였다.

"불편해요?"
"아니요."
"그러면?"
"실감이 안 나서요."

입술이 꾹 다물리는 게 보인다. 아마 '또?'라는 말을 도로 삼켜내는 중이겠지. 바다를 보러가는 중이었다. 예정에는 없던 비 소식으로 차를 돌려 다시 서울로 가는 중이긴 하다만.

"저녁은 없던 걸로 해요. 좀 피곤해서."
"저 그냥 집에 가라고요?"
"네."

백현이 잡았던 손을 풀고 그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제 앞에선 안 피우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또 대꾸가 없다.

"말 안 걸어 주기를 원해요?"
"경수 씨."

눈이 마주쳤다. 경수가 건조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자 백현이 말했다.

"미안해요. 머리 아프니까 조용히 좀 해 줘요."

강서구 들려서 들어가죠. 백현이 운전 기사에게 건넨 말 뒤론 정적만 흘렀다. 몇 가구 없는 산동네에 어둠이 찾아온 듯 귀뚜라미 소리가 골을 울릴 것만 같았다. 옆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든 마시든 경수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애초에 마음도 없는 연애. 음... 연애랄 것도 없다. 백현이 먼저 들이대고, 손 잡고, 바다 보러 가자고 했으니까. 백현은 이런 걸로 동생의 목숨을 퉁치려는 것 뿐이다. 구름이 운다. 서럽게도 펑펑 운다.

"미안해요."

도로 손바닥을 감싸오는 따뜻한 손을 피하진 않았다.



*



내 청춘은 온통 까만 잿빛이었다. 살아왔던 인생을 모조리 태워서 남은 재를 길에 뿌려 놓은 듯이, 온통 새카맣기만 했다. 그런 나에겐 어려서부터 둘이서만 쭉 자라온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얼마 전 교통사고로 예고없이 날 떠났다. 고가의 거울도 깨지면 그냥 깨진 거울이듯이... 사람도 무슨 일을 하였던 간에 죽으면 그만이란 것을 알았다. 그간 쌓인 감정이 한순간 우루루 쏟아지던 순간이었다. 네가 좋아하던 복숭아도 원없이 먹어 보지 못 하고 가는구나.

"백현 씨는 참 착한 것 같아요."

처음 백현과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지만 경수 씨만큼 슬픔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갑자기요?"
"늘 별 볼일 없는 저를 신경 써 주시니까요."

백현은 미소만 띄웠다. 경수는 그걸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좋아서 웃는 걸까? 돌려서 욕한 것이란 걸 느끼지 못한 걸까? 괜히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식사 끝나고 제 집으로 가요."
"싫어요."
"네?"
"집에 갈래요."

단칼에 거절 당한 백현이 포크질을 하다 말고 접시 가장자리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백현 역시 경수만큼 건조한 표정을 자주 지었는데 지금 역시 그 표정이었다. 애써 기가 참을 가려놓은 듯 아무 감정도 그려지지 않은 건조함 그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복수예요?"

경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수냐고요."
"복수라뇨?"
"전에 저녁 약속 깬 거. 그거 때문이에요?"
"솔직히 말 해서 맞아요."
"그 날은 정말 두통이 심했어요. 알잖아요. 비만 오면 머리 아픈 거."
"누구보다 잘 알죠."

괜한 말을 한 듯 백현이 곧바로 눈을 피하며 큼, 하며 헛기침을 했다. 백현이 고기를 깨작깨작 입에 넣는 경수의 눈치를 보았다. 핑계 대지 말 걸, 입이 방정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작게 흘러나오는 내부 안엔 백현과 경수가 있는 테이블 제외하곤 전부 공석이었다. 안림호텔 내부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평소에는 늘 만석이다. 좀처럼 자리가 날 생각을 하지 않는. 무조건 예약제로만 운영되는 이 레스토랑이 이렇게 텅 비어있는 이유는 경수 때문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기 때문에 백현이 손을 쓴 것이었다. 오늘 하루 두 시간 동안은 오롯이 경수와 백현 둘만을 위해서만 운영된다. 인테리어 컬러는 올드함은 찾아볼 수 없이 온통 화이트였다. 클래식과는 어쩐지 이질감이 들었다. 창문마다 달려 있는 베이지 커튼을 제외한다면. 레스토랑 눈치를 살피던 경수가 물었다.

"제가 민폐는 아닌 거겠죠."
"앞으로 장소는 더 신경 쓸게요."

이럴 때 보면 백현이 정말 눈치가 빨라서 큰 사람이란 건 실감이 난다. 식사도 자주 같이 하고. 서로의 집을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고. 스킨십은 손 뿐이지만 손 마저도 자주 잡는 편이었다. 연애일까? 우리가 하는 게 연애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백현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한데. 사귀자는 말 하나 없이 이러는 게 어른의 연애 이따위 쯤이나 되는 걸까.

"백현 씨 존재감이 실감 나네요."
"그런 말 마세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실감 나는 게 있다니 다행이네요. 라며 백현은 덧붙였다. 슬쩍 올라간 광대가 보인다. 높은 곳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면서도 이런 말은 낯간지러운가 보다. 곳곳으로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날씨가 좋네요."

다행히도.



*



"거리의 벚꽃이 지고 있어요."
"금방 지죠, 벚꽃."

벚꽃잎을 그리던 경수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백현도 무심하게 대답했다. 분홍색으로 그린 꽃잎에 진분홍색을 옅게 덮는 와중이었다.

"벚꽃구경은 왜 가는 걸까요."
"눈이 즐겁잖아요. 경수 씨는 벚꽃에 흥미가 없나 봐요?"
"외출을 즐겨 하는 편이 아니니까요."
"... 저는요?"

뜬금없이 질문을 들은 경수가 옆 캔버스 앞에 앉은 백현을 보았다. 백현은 경수를 흘끗 한 번 본 뒤 시선을 다시 캔버스로 옮겼다.

"나 만나는 거 말이에요"
"즐거우니까 부를 때마다 나오겠죠."
"진심이에요?"
"거짓말이게요?"

꽤 까칠하게 대답한 경수의 말에도 마냥 기분 좋은 듯 백현은 얼마 안 가 콧노래를 불렀다. 제목도 모를 노래, 어쩌면 내키는 대로 부르는 중일지도 모르는 콧노래를 그냥 듣고만 있었다. 긴 병 안엔 벚나무 가지가 들어있다. 예쁜 꽃도 많은데 왜 하필 벚꽃일까. 굳이 물어 보지는 않았다. 새삼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말이 많았는가에 대해 생각할 때 쯔음에 백현이 경수의 옆으로 의자를 바짝 붙여왔다. 백현은 흑색 앞치마의 매듭을 풀며 말했다.

"경수 씨 평일에 일 언제 마쳐요?"
"오후 8시요. 왜요?"
"평일에도 만나고 싶어서요."
"평일엔 그쪽 일에나 집중 하세요. 안 그래도 바쁘신 분이."
"경수 씨가 좋아요."

붓이 들린 경수의 손이 미약하게 파르르 떨린다. 백현이 살며시 어깨에 볼을 누이면서 머릿결이 사라락,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부드럽게 목덜미에 닿아온다.

"일보다 경수 씨가 더 좋아요."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붓 따위 것은 던져놓고 곧장 집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다. 곧 심정지가 올 것처럼 심장이 파닥파닥대었다. 분명 마음이 요동치고 있는데, 얼굴이 터져 버릴 것처럼 뜨거운데, 물과 기름이 섞여진 듯한 기분은 떨칠 수가 없었다.



*



시각은 자정이 조금 넘은 뒤였다. 하늘은 까맣고 공기는 습했다. 동생은 자정까지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큰 길가로 나서던 찰나에 주인 모를 차로부터 뺑소니를 당했다. 경수가 들었던 사고 경위는 이렇다. 동생을 치어 버린 차의 주인이 백현의 전 운전기사였던 것도, 모두 백현에게 들었다. 동생은 일개 아르바이트생이었고, 경수는 집 근처에서 미술학원 강사로 일했다. 가족도 없고 친척도 없다. 우릴 키워 주신 분을 굳이 말 하자면 춘천에 계신 수녀님. 이 정도. 백현 때문일까. 어딘가 모를 벽이 생겨 버려서 동생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졌다.



*



"경수야. 건배 안 해 줄 거야?"

아, 응. 다급하게 잔을 들어 잔을 부딪쳐 주었다. 세훈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근무하고 있는 미술학원의 원장이다. 학창시절 유일하게 친했던 친구였던 것 같다. 세훈에게는 아닐 테지만. 소주가 적시고 지나간 입안이 쓰다.

"갑자기 무슨 휴가야."
"쉬고 싶어."
"너 무슨 일 있지. 생전 휴가같은 거 안 쓰던 애가 무슨."
"한 달만, 한 달이면 돼."
"... 그래."

세훈은 무뚝뚝해 보였지만 생각이 정말 깊었다. 단 시간 내에 문제의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경수의 전화 벨이 울렸다. 역시는 역시, 백현이었다. 침을 한 번 삼킨 경수가 전화를 받아들었다.

"네."

정확히 통화음이 세 번 울린 뒤였다.

-어디예요?
"친구랑 한 잔 하려고 나왔어요."

분명 백현은 경수의 집 앞일 것이다. 문을 두드리고 벨을 울려도 경수가 나타나지 않았을 테지. 백현이 옅게 웃는 소리 들렸다.

-누군지, 어딘지. 간섭하지 않을게요.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아쉽네요. 들어갈 때 전화 주세요.
"네... 그럴게요."

경수를 계속 주시하던 세훈이 말했다.

"신경 좀 쓰이지 않게 해 줘."
"네가 왜 신경이 쓰여."
"너 너무 평온해. 동생 일 일어나기 전보다 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세훈이 농담이나 할 인간은 아닌데.

"요즘 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해."
"뭐?"

세훈 편으로는 좀 생소할 수도 있다. 경수는 한 평생을 혼자 살겠다고 선언해도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까. 애가 너무 조용하고 분위기가 암울하다는 핑계로 온갖 괴롭힘을 당해도 끄떡않고 학교를 다니던 경수다. 세훈이 괜찮냐 물어올 때마다 고개만 끄덕일 뿐 괴롭힌 아이들에 대한 험담도 하지 않았다. 아예 다른 사람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세훈은 저도 모르게 소주를 혼자 홀짝 홀짝 마셨다.

"난 아직 마음 없어. 순 제멋대로인 사람이야."
"어떻게 만났는데? 나 궁금한 게 많다."
"궁금해 하지 마. 나중에 시간 나면 이야기할게."
"뭐... 그래. 네가 내킬 때 해."

그 뒤론 쭉 일 얘기만 했다. 진도는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학원 광고를 낼지 말지. 시덥잖은 얘기들 뿐이지만. 경수는 웃고 있지 않고 있지만. 분명 기분이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문득 든 생각이었다. 안림호텔을 쥐고 있는 사람... 한 편으로는 두근거렸다. 그런 사람이 나를, 나를. 동생이 호텔리어를 꿈 꾸던 때가 생각 난다. 이런 식으로 드문드문 백현과 연계된 부분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지어낸 거짓말처럼, 꿈 속의 허상처럼.

"일어나자."

백현이 보고 싶었다.



*



빌라 안으로 들어섰을 땐, 바로 집 문 앞에서 셔츠 윗단추 몇 개를 풀어헤친 채 괜한 바닥만 구두코로 때리던 백현을 발견했다.

"뭐 하세요?"
"아, 왔어요? 기다렸어요."
"왜요?"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올렸다 내리는 백현 때문에 황당했다.

"통화한 지 두 시간이 넘었는데, 여태 기다린 거예요?"
"네. 차에 있으려고 했는데... 그럼 잠이 올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바보같이 기다리면 어떡해요. 연락하면 비밀번호라도 알려 줬을 텐데."

내심 화가 난 듯 도어락 번호를 꾹 꾹 짓누르는 경수를 보며 백현이 살풋 웃었다.

"비밀번호도 알 만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쁘네요."
"헛소리 마세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백현이 말했다.

"한 잔 한다면서 별로 안 취해 보이네."
"말술이라서요."
"아."

정장 자켓을 소파에 걸쳐 놓은 백현은 소파 위로 털썩 앉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경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게 걱정이라는 감정이라 좀 낯설었다. 동생도 아닌 사람에게 걱정이라니.

"경수 씨 만난 이후로 일이 잘 풀려요. 수울~ 술."

컵에 물을 쪼르르, 담았다.

"앞으로도 이대로면 좋겠어요."
"무슨 뜻이에요?"
"경수 씨가... 이젠 절 좋아했으면 좋겠다고요."
"... 너무 비집고 들어오려고 하지 마세요. 난 모든 게 처음이에요."

알았어요. 하며 백현은 큭큭 웃었다. 불거진 볼을 한 채로 탁자에 컵을 내려놓는 경수의 어깨를 잡아 얼굴을 올려다보는 백현이 말했다.

"내일 출근 안 해요. 자고 갈 거니까 옷 좀 빌려 줘요."
"막무가내이시네요."
"별로예요?"
"조금."
"조심할게요."

또 살풋 웃는다. 거 진짜 웃기는 놈일세... 괜히 손을 떨어댈까 봐 옷을 가지러 빠르게 안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백현은 연애도 많이 해 봤겠지. 나와는 달리 전부 경험해 본 것들이겠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이게 다 저 자식 때문이다. 아, 처음이란 걸 말 하지 말 걸 그랬나. 언젠가 약점이 되지는 않을까...



굳이, 또 굳이. 내 옆에서 자야 하는 걸까. 아주 고귀하신 분이 이런 좁은 곳에서 편히 잘 수나 있나를 생각하던 경수에게 백현이 말을 걸어 왔다.

"연극 좋아해요?"
"그닥이요."
"경수 씨 연애 초보 티 완전 나는 거 알아요?"

비웃음을 당한 것 같아 백현이 덮고 있던 이불까지 빼앗았다. 아, 아. 이불을 달라는 듯 이불을 잡고 늘어지는 백현이 말했다.

"왜 좋아하냐고 묻겠어요. 보러 가자고 묻는 거지."
"놀리면 재밌어요?"
"미안해요."

백현은 백현만의 확고한 화법이 있었다. '~래요?, ~면 안 돼요?'이 아닌 '~해요, ~줘요' 이런 말로 문장을 끝맺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비주얼로 눈물 뚝뚝 흘리면 세상 천지 안 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순간 쪽, 하고 볼에 따스한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너무 놀라 벙쪄 있는 경수에게서 백현이 등을 돌리며 말했다.

"이불 안 주고 싶음 안 줘도 돼요. 그리고 나중에 연극도 같이 보러 가 줘요. 보러 갈 만큼 친한 친구가 없거든요. 경수 씨를 빼면."

꼴깍, 침을 삼켰다. 백현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잠에 든 듯 했다. 일어나 앉은 경수는 느릿하게 구겼던 이불을 펴 잠 든 백현에게 반절을 꼬옥 덮어 주었다. 입술이 닿았던 볼이 뜨겁다. 커튼이 걷어진 창문에서 푸른 달빛이 새어 나오고 빌라 앞 치킨 집에서 분주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옆에선 색색 소리를 내며 고요히 자고 있고, 미칠 노릇이었다. 여태 살아온 인생 중 처음으로 받은 키스였다. 고로 첫키스다... 그대로 경수는 베개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아침이 되어서도 아마 고개를 들지 못 하겠지.



*



이유없이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다. 창틀에 왼팔을 걸쳐 담뱃재를 털었다. 비서도 동행하지 않고, 운전 기사도 퇴근 시킨 채  도로를 달렸다. 겨울 바람에 얼굴이 얼 것 같음에도 백현은 절대 창문을 닫지 않았다. 오히려 앞만 노려본 채로 악셀을 밟을 뿐이었다. 자정의 도로는 제법 한산했다. 높고 굳게 선 높은 건물들은 종종 불 켜진 곳이 있었지만 회사만 가득한 이 길에선 인도에도, 도로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날씨가 나쁘지도 않고 기분 나쁠 만한 일도 없었다. 그치만 그냥 기분이 나빴다. 아시아가 주목하는 안림호텔. 손에 넣기야 했지만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차남으로서 형을 제치고 계열사를 먼저 쥐었지만 속이 후련하진 않았다. 스트레스는 더 쌓여만 갔다. 투명한 무언가가 마음 속에서 쌓이고 또 쌓여서 씻어내지 못할 분노를 유발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코너를 돌던 순간 퍽! 하고 본네트 쪽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부딪쳤다. 무언가를 치고 난 뒤 3m 앞에서 차를 세운 백현이 한숨을 쉬었다. 코트를 조수석에 벗어 던지면서 차에서 내렸다. 담배 연기를 한껏 뱉었다. 연기가 백현의 자취를 남기다가 곧 사라졌다. 저 횡단보도 위에 쓰러진 게 사람인가. 피칠갑이 된 것을 보니 사람이 맞나 보다. 차창에 기댄 백현이 꺼지지 않은 담배를 저 멀리 던지며 어딘가 본능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상대방은 전화를 바로 받았다.

"박비서, 나 사고 쳤는데 뭐부터 하면 될까?"



*



-날 때부터 고아에다 지인 중 영향력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도경수 씨 입 단속만 제대로 된다면 빠르게 사건 처리 할 수 있습니다.
"연극을 하라... 이겁니까?"
-네. 대표님을 위해서 최대한 일찍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운전대를 잡은 건 뒷좌석에 백현을 태운 운전 기사인 것으로 새 각본이 쓰이고 있다. 검지로 테이블 툭, 툭 두드리던 백현의 시야에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는 경수가 보였다.

"네, 네. 알겠으니까 변호사님 께서 능력껏 열심히 해 줘요."

급하게 전화를 끊어 휴대폰을 비서에게 건넨 백현이 비서에게 이만 자리를 비킬 것을 손짓했다. 비서는 묵례를 한 뒤 멀뚱히 서 있는 경수를 지나쳤다.

"도경수 씨! 여기예요."

백현이 팔을 스윽 들자 경수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기본적인 인사도 없이 앞 자리에 털썩 앉은 경수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들어차 있지 않아 공허해 보였다.

"장례식장에서 처음 뵙고 두 번째로 뵙네요. 동생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그쪽이 누군데요."
"아, 그때 소개를 안 했었나요."

너무 울어 불거진 눈주위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낸 백현이 테이블에 올린 뒤 경수 쪽으로 명함을 쭈욱 내밀었다.

"제가 안림호텔 총지배인 변백현이에요. 제 수하직원들이 경수 씨 무지 신경 써 드리고 있는데..."
"......"
"마음 아프신 것 잘 알아요. 제가 잘 챙겨 드릴게요."
"그래서 절 여기로 부르신 거예요? 당신 거라?"
"네. 우선 제 숲을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숲?"
"네, 숲이요. 이곳이 제 숲이에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질 거예요."

도경수 씨.

"제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 왔지만 경수 씨만큼 슬픔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백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수  (0) 2018.06.09
  (0) 2018.04.14
품에 안아  (0) 2017.03.25
하늘이란  (0) 2017.03.18
BITTER  (2) 2017.03.11
아람  (2) 2017.03.04
댓글
댓글쓰기 폼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Total
8,879
Today
0
Yesterday
1
링크
TAG
more
«   2022/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